소설 <동산리 히든 할매들과 만나다방> 4화
이른 아침, 주현은 김명희와 마주 앉아 있다. 엄밀히 말하면 김명희의 영정 사진으로 쓰였을, 검은 프레임의 액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주현은 액자와 오른손에 든 작은 손거울을 번갈아가며 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주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실은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주현은 생각했다. 짙은 쌍꺼풀의 눈과 뾰족한 코끝, 도톰한 입술. 김명희의 특징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얼굴이 손거울 위에 떠올라 있었다.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는 말을 지겹게 들으며 자라왔지만, 친모와 이리도 닮지 않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처럼,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운명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일 따위는 어느 정도 닮은 구석이 있어야 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주현은 김명희의 사진 속 표정을 그대로 따라해보았다.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올리고 웃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잘 쓰지 않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려왔다.
주현은 사진을 원래 있던 TV 선반 첫 번째 서랍에 다시 넣을까 하다가, 그대로 들고 거실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무엇을 먹을 때 즐거운 표정을 짓는지, 어떤 때 슬픈 마음이 드는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는 무엇이었는지 주현은 김명희에 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딱 하나 알 것 같은 건, 그러니까 주현도 오고 싶어 했던 바다를 김명희가 무척 좋아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취향이란 것도 유전이 될 수 있는 걸까. 주현은 김명희의 사진을 거실 창문과 가까운 곳에 잘 세워두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닷바람이 집 안으로 빠르게 밀려 들어왔다. 바람은 커튼을 흔들고, 가만히 내려앉아 있던 먼지를 순식간에 공중에 띄워 흩어지게 했다. 주현은 큰 소리로 재채기를 했다. 그 소리에 1층에 있던 두콩이 놀란 얼굴을 하고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주현은 딱 한 번 재채기를 했을 뿐인데, 두콩은 집안이 떠나가라 짖었다.
색 바랜 물건들이 가득 쌓인 창고 방에서 초식 공룡처럼 목이 길고 무거운 청소기를 끌고 나왔다. 전원을 연결하자, 오래된 청소기가 작동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반대로 흡입력은 약했다. 그 덕분에 주현은 청소기를 천천히 끌고 다니며, 집 안 구석구석을 음미하듯 돌아다녔다. 세월의 흔적이 묻고, 손때가 탄 크고 작은 물건들을 지나쳤다. 특히 모양이 각기 다른 찻잔이 모인 진열장 앞에선 한참을 더 머물렀다. 유명 관광지의 랜드마크가 그려져 있거나, 본래의 기능보다는 장식품의 성격이 강한 컵까지. 만든 곳도 다양했다. 메이드 인 이태리, 파리, 스페인....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찻잔인 듯했다.
은은한 광택을 띠는 찻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다른 찻잔에 비해 크기는 작았지만, 가장자리에 금테가 둘러 있고 정교하고 세밀한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엄지와 검지, 중지만을 사용해 살며시 잡아야만 손에 들어오는 얇은 손잡이도 특징적이었다. 주현은 김명희가 파리의 한 상점을 기웃거리며 찻잔을 고르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에는 낭만적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상상을 했지만, 점차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이 오버랩됐다. 밝은 낮의 파리와 어두운 밤의 서울이 교차했다. 등장인물은 달랐다. 파리의 김명희, 서울의 최주현. 상상 속 주현은 잘 마르지 않아 쉰내가 나는 교복에 드라이기 바람을 쐬며 지각 걱정을 하고 있었다. 때로는 고픈 배를 부여잡고 잠들기 위해 애쓰는 밤을 보내기도 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전선의 끝을 찾아 플러그를 뽑아, 다음 방의 콘센트에 꽂았다. 양쪽 벽면이 책으로 가득 차 있는 방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고, 책상을 덮고 있던 흰 천을 걷어 개었다. 고풍스러운 책상이었다. 반쯤 읽은 책이 뒤집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평범한 여행 에세이 책이었다. 그게 너무도 평범한 주제의 것이라, 그리고 다시 돌아올 것처럼 읽은 부분을 뒤집어 놓은 것에 주현은 김명희의 죽음을 처음으로 가엽게 생각했다. 책갈피 하나를 집어 들어 책 사이에 끼워 넣고, 서가 빈칸에 책을 가지런히 꽂아두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맨 아래칸에는 각종 고지서들이 가득했다. 파란색 펜으로 '완납'이라 손글씨를 쓴, 날짜가 오래된 것들이었다. 그 위칸에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핸드크림이나, 쓰다 남은 포스트잇, 스테이플러 같은 잡동사니들이 뒤섞여 있었다. 남은 물건들은 자꾸만 김명희의 지난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워한 적도 그렇다고 좋아한 적도 없는, 그러한 모든 판단을 보류한 사람에 관해 생각한다는 건 꽤 복잡한 마음이 드는 일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찾어.”
아래위로 화려한 색의 스포츠웨어를 입은 영춘이 문 앞에 우뚝 선 채 주현을 향해 물었다. 누군가 들어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주현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도 화끈거렸다.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주현은 영춘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나는 대체 뭘 찾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현을 보고 있던 영춘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은 청소기를 발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부지런한 것 하나는 쏙 빼닮았네. 그런데 지금 청소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영춘이 먼저 부엌 쪽으로 걸어갔고, 주현은 그 뒤를 졸졸 쫓아갔다. 식탁 위에는 은색 스텐 그릇이 놓여 있었다. 지난번과 크기와 색이 같은 그릇이었지만, 안에 더 많은 양의 물회가 들어 있었다. 동그랗게 펀 오징어 회가 두 덩어리나 들어가 있는. 영춘은 식탁 의자에도 앉지 않고, 선 채로 끊임없이 스쿼트를 하고, 팔과 다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스트레칭을 했다. 주현은 다소곳이 앉아 영춘이 차려준 물회를 퍼먹었다. 역시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맛이 있었지만, 이번엔 주현은 울음마저 같이 삼켰다. 주책맞게 우는 일은 한 번이면 족했다. 울음은 참아도 콧물을 참을 방법은 알 수 없었기에, 옷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으며 주현은 그 많던 물회를 금세 싹 비워냈다.
“운동 가시나 봐요?”
“오늘 중요한 날. 체육대회 마지막날.”
흡흡,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을 조절하며 영춘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체육대회요?”
“그래. 동산리에서 가장 큰 행사. 일주일 동안 꼬박 열리는데, 오늘 결승전. 이번에는 너 찾으러 다니느라 잠이 부족한지 기록이 좋지는 않았지만."
주현은 처음 주옥빌라에 자신을 데리러 온 영춘이 운동용 헤어밴드를 하고 있었던 것이나, 지난날 급히 어디론가 향하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다 먹었으면 가자."
"어딜요?"
"볼만할 게다.”
의자를 붙잡고 몸의 무게 중심을 아래로 낮, 한쪽 다리를 옆으로 길게 뻗고 있던 영춘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으로 온몸을 짝짝 소리가 나도록 때리면서 몇 걸음을 걷더니, 거울 앞에 멈춰 헤어밴드를 정중앙에 잘 맞췄다. 성큼성큼 앞서 걷는 영춘의 뒤를 주현이 따랐다. 그 뒤는 두콩이 이었다.
"아, 문을 잠가야 하는데."
출입문을 나서다 황급히 돌아선 주현이 말했다. 영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쇠도 없을 거라며 얼른 따라오라고 소리쳤다. 단속하지 않은 출입문이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뒤로한 채 주현은 영춘을 따라잡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마당을 지나, 바닷길을 조금 더 지나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저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희미한 팡파르 소리를 들었다.
*
전형적인 바다 마을의 좁은 골목과 낮은 집을 지나, 차로를 따라 30분쯤 걸었을까. 영춘은 양쪽으로 나무와 풀이 줄지어 있는 오솔길로 방향을 틀었다. 팡파르 소리는 더 가까워졌고,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이 오손도손 모여 줄다리기를 하고, 소박한 게임을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좁은 길이 끝나고, 주현의 눈앞에 거대한 건축물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동산리 스타디움'은 능만산 숲 속 넓고 푸르른 들판 위에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고대 유적을 연상케 하는 돌로 만든 경기장은 높이와 크기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었다. 경기장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주현은 몇 번이고 고개를 좌에서 우로,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그러는 사이 영춘은 경기장 동쪽의 커다란 아치형 문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경기장에 감탄하고 있는 것도 잠시, 주현은 이곳을 찾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또 한 번 놀랐다. 영춘처럼 근육질의 할머니들이, 형형색색의 운동복을 입고 빠른 걸음으로 동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대강 살펴보아도 엄청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두꺼운 밧줄을 꼬아놓은 것처럼 두껍게 자리 잡고 있는 근육 위에, 세월의 거친 흔적이 새겨진 것 같은 잔주름이 진 단단한 피부가 햇빛에 번들거렸다. 묵직한 짐백을 든 팔에는 굵은 혈관이 튀어나왔고, 꼿꼿한 허리의 끝에 어깨가 넓게 발달해 있었다. 하나같이 탄력 있는 종아리 근육으로 사뿐사뿐 가볍게 걸었다. 발을 끌듯이 터덜터덜 힘없이 걷던 주현도 덩달아 허리를 세우고, 발 뒤꿈치를 살짝 들고 걸었다. 몇 걸음 내디뎠는데도 종아리가 쥐가 날 것처럼 간질거렸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타원형 운동장이 가운데 있고, 3층 높이의 객석이 둘러져 있는 형태였다. 주현은 배달일로 축구 경기장에 딱 한 번 들어가 본 적 있었다. 치킨 배달을 시키고, 배달존으로 받으러 나오지 않고 좌석 번호를 알려준 진상 손님을 만난 날이었다. 한참을 헤매고서야 배달 봉투를 건넬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축구 경기장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생생히 기억하게 됐다. 주현은 동산리 스타디움 내부를 훑어보며, 축구 경기장의 절반 정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히지 않은 경기장 천장 위로 파란 하늘이 지붕을 대신해 덮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체육대회 플래카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제76회 동산리 체육대회 - 동산리 최강, 세계 최강!’
주현은 플래카드 문구에 동의를 하면서도, 의문이 일었다. 도대체 이렇게 대단한 할머니들이 모여 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했을까. SNS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아니 초 단위로 세상의 이상한 일들이 짧은 클립으로 편집돼 퍼 날라졌다. 그 콘텐츠들을 꾸역꾸역 삼키던 지난 기억들을 아무리 되감아 보아도, 바다 마을의 콜로세움 같은 경기장이나 근육질 할머니들에 관한 내용은 본 적이 없었다.
주현은 영춘의 자리 옆에 나란히 앉았다. 영춘은 챙겨 온 짐백에서 체육대회 팸플릿을 한 장 꺼내 주현에게 건넸다. 주현은 받아 든 팸플릿을 둥글게 말아 쥐고, 주변을 살피는데 정신이 팔렸다. 영춘이 짐백 안의 운동 용품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허벅지 근육이 타조 같은 정 씨는 산 아래서 당근 농장을 해. 등짝이 고래만 한 김 씨는 뱃일을 하고. 오른팔이 왼팔보다 훨씬 두꺼운 강 씨는 예전에는 정미소를 하고 있고. 참, 강 씨를 팔씨름으로 이긴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아마."
신호총소리가 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지며, 첫 번째 경기인 '1톤 모래 수레 끌기 대회' 순위 결정전이 시작됐다. 부산하던 객석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모래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끄는 다섯 할머니들이 모래 폭풍을 만들며 결승선을 향해 달려갔다. 뿌옇게 모래 먼지가 일어 공기를 매캐하게 만들었다. 시야가 선명하진 않았지만, 주현은 경기에 참가한 할머니들의 불거진 팔 힘줄과 단단한 종아리 근육에 감탄했다. 이내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파마머리의 선수가 수레를 뒤집으며 포효했다. 주현은 입 안에서 모래의 꺼끌꺼끌하고 텁텁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순서인 수레 끌기 대회의 결승에 출전하는 영춘이 묵직한 짐백을 어깨에 둘러멨다. 영춘이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온 수레에 모래가 무덤처럼 높게 채워지고 있었다. 주현은 영춘이 준 체육대회 팸플릿을 앞 장부터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각 경기별 대진표와 일정, 개회와 폐회 공연 등 구성이 알찼다. 여기까진 평범한 체육대회와 비슷해 보였지만, 종목이 달랐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런 특별한 종목들이었다.
1톤 모래 수레 끌기, 트랙터 타이어 멀리 던지기, 스피드 나무토막 쪼개기, 왕복 바윗돌 굴리며 달리기, 불타는 줄다리기....
장내 방송에서 결승전 참가자들을 찾는 소리가 반복해서 퍼져 나왔다. 소리는 넓게 퍼져 나가다가, 높은 경기장 외벽에 부딪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객석 곳곳에서는 짐을 챙겨 일어나는 사람과, 새로이 자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정신없이 뒤엉켰다. 활기찬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흐르는 땀을 닦고, 각자의 방식으로 몸을 푸는 형형색색의 운동복을 입은 할머니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주현은 하루 온종일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춘이 수레 옆에 서고, 다시 헤어밴드를 가운데로 맞추고, 장갑을 끼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하는 모든 모습을 진귀한 광경을 보는 것처럼 지켜봤다. 영춘의 얼굴은 여유로워 보였다. 주현은 이 마을에서 아직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곤 영춘이 전부였기에, 기왕이면 아는 사람이 우승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음속으로 응원을 했다.
"어? 뭐지?"
형광 연두색 헤어밴드를 한 할머니가 수상했다. 영춘 바로 옆 수레에서 준비를 하고 있던 할머니는 좀 전부터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 영 거슬렸었다. 꽤 오래도록 수레를 점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실은 자신의 수레에 실린 모래를 한 주먹 쥐어 주머니에 넣었다가 슬금슬금 영춘의 수레 쪽으로 가서 모래를 얹는 식이었다.
이상하게도 주현의 곁엔 뻔뻔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 몫을 챙기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일 따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너무 당당해서, 뺏기는 사람은 자신이 부당한 일을 겪는다는 사실을 당장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현도 그랬다.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이라거나 너는 정말 좋은 사람, 이라거나 주현의 눈을 가리는 말을 앞세우면 더더욱 알기가 어려웠다. 빼앗길 몫이 완전히 없어지면, 친밀함을 가장한 관계들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는 걸 주현은 늘 관계가 끝난 뒤에야 깨달았다. 스스로를 자책했다.
주현은 지금껏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먹을 꽉 쥐고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영춘이 당하고 있는 게 마치 미련했던 과거의 자신의 모습 같아서, 저렇게 뻔뻔한 걸 알아차리지도 못한 자신이 멍청하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주현은 심판이나 그도 아니라면 영춘에게라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만 같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는 사이에도 형광 연두색 헤어밴드는 또다시 자신의 수레로 가 모래를 한 움큼 쥐어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었다.
서둘러 내려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다가, 주현은 마주 오던 사람과 세게 부딪혔다. 주현의 이마가 상대의 코를 가격하는 바람에, 상대는 코를 쥐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마른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그는 우는 것처럼 훌쩍이는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운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주현은 그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더 엄밀히 얘기하자면, 미안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크게 부풀려서 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크게 다치기라도 한 것이어서, 합의금이라도 요구한다면 큰일이었다.
결승을 알리는 신호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 하는 객석의 함성 소리, 휘파람 소리가 마구 뒤섞였다. 순위 결정전과는 완전히 다른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주현은 그 소란 속에서도 남자의 끙끙 앓는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박복한 인생을 원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