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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cy Feb 01. 2022

시어머니께 실수로 효도한 사연

좀 슬프고 웃긴 이야기



어머님이 무섭고 미웠다. 시댁에 갈 생각을 하면 거짓말이 들통나서 혼나러 가던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른 앞에서도 좀처럼 주눅 드는 일 없이 넉살 좋은 나도 어머님 앞에만 가면 몸이 뻣뻣해졌다.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어머님은 눈길 한번,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셨다. 만나 뵙기 전부터 남편은 여러 번 경고했었다.

"엄마랑 절대 잘 지낼 수 없을 거야."

그래도 내심 나는 자신이 있었다. 진심은 언제나 통하기 마련이고, 내 진심은 늘 잘 통해왔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연약한 진심은 빛을 잃었다. 시댁에 다녀오는 길은 매번 남편과의 싸움으로 얼룩졌고, 어머님은 어느덧 평화로운 우리의 시간을 위협하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있었다. 가끔은 아무 잘못 없는 남편도 미워졌다. 마음에 생긴 작은구멍은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벌어졌다.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돌아보는 건 내 마음이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하지는 못하지만, 내 마음을 좋게 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마음에 미움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결국 작년 추석, 어머님 댁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미안한데 당분간 나는 어머님한테 못 가겠어."

남편은 괜찮다고, 내 마음이 편한 게 먼저라고 이해해주었다. 자꾸만 보면서 미움을 쌓는 것보다 미안한 마음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라던 대로 작년 추석 이후 나는 더 이상 어머님을 뵙지 않았고, 미움으로 들썩이던 마음도 한결 잔잔해졌다. 한번씩 어머님이 떠오르거나 남편에게 소식을 전해 들을 때면 '어머님이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주문처럼 반복했다.


설날 아침, 남편은 11시까지 시댁에 가기로 했다며 혼자 남을 나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책상에 앉아 줄곧 어머님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혼자 계시는데 나까지 안 가서 우울하진 않으실까?… 편지라도 쓸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되지, 어머님이 싫은 건 아니지만 아직은 보고 싶지 않다고 쓸 수도 없고….'

그때 '월세이체'라고 알람이 울렸다. 살고 있는 집 월세를 내는 날이다. 미루면 잊어버릴까봐 얼른 은행 앱에 접속해 월세를 보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른 후 이체 완료 메시지가 뜬 것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한은행 ooo님께
X00,000원이 이체되었습니다.


아니 왜.. 여기 어머님 성함이..

정말 0.01초쯤? 헉! 했다가, 상황 파악이 되자 웃음이 터졌다.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던 남편이 방까지 들리도록 크게 묻는다.



왜? 왜?? 뭐가 그렇게 웃겨?


재미있는 비밀을 가진 사람처럼 나중에 말해준다고 대답하고 진짜 월세까지 제대로 보내고 나니, 이번 달 생활비로 책정해 놓은 돈이 쑥 줄어들었다. 경제적 형편이 우리보다 넉넉하신 어머님께 매달 드리는 용돈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아무리 설이라도 월세만큼의 용돈을 드리는 건 제정신으론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의도치 않게 지출된 큰돈이 아깝다는 생각보다, 실수 덕분에 '효도'를 하게 돼 잘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런 아찔한 실수에도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내가 되었다니. 바닥난 통장 잔고보다, 넉넉해진 마음이 더 반갑게 느껴졌다. 


내친김에 어머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하길 바라며 편지를 썼다. A4지 3장이 넘어가도록 쓰다가, 오해를 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 지우고, 어머님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썼다. 늦어도 내년 설에는 어머님을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한바탕 가벼운 소동이 지나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남았다. 설날 아침 혼자 먹는 아침이 맛있었다.


 



백군이 차려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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