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는 구례 일상
백군은 열심히 한옥을 고치고 있다. 두 겹으로 막혀있던 천장을 털어내니 서까래가 모습을 드러낸다. 한 달 동안 천장을 털어내더니 한동안은 벽지를 뜯어냈다. 벽지가 열 겹 이상 흙벽에 착 붙어있었다. 벽지를 다 뜯어내더니 요즘은 서까래를 갈아내고 있다. 윙윙 시끄러운 소리를 내기 때문에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서면 괜히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빵을 별로 즐기지 않지만 주인아저씨가 좋아서 동네 빵집에도 가고, 귀여운 주인이 있는 편집샵에 놀러 가기도 한다. 가장 기다리는 곳은 목, 금, 토만 문을 여는 '새참 먹는 시간'이다. 이곳의 주인인 아나는 (나 혼자) 구례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다. 백군이 한동안 서울에 가있어서 집에 혼자있다는걸 알았을 때 밤에 무서우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준 순간 마음속으로 가장 친한 사람이 되었다. 아나는 모르는 게 없다. 오늘은 어딜 가면 좋을까? 어른을 모시고 가기 좋은 식당은? 맛있는 중국집은? 산책하기 좋은 곳은? 어떤 질문을 해도 척척 대답해준다. 그리고 그 답은 전부 다 맞았다. 직접 기른 채소를 활용한 요리를 하는 새참의 메뉴는 대부분 샐러드다. 나는 샐러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나를 보려고 매주 가서 샐러드를 먹었더니 샐러드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이제 집에서 샐러드를 만들어 보기도 할 정도로 샐러드를 즐기게 되었지만 내가 만든 샐러드는 어쩐지 맛이 덜하다.
구례의 가게들은 문을 여는 시간이 길지도 않고 자주 일하지도 않는다. 점심시간에만 잠깐, 쉬는 날도 많아서 문을 여는지 꼭 미리 확인을 해보고 가야 한다. 가게나, 도서관에 가거나, 산책을 하고 나선 백군과 점심을 먹기 위해서 집에 돌아온다. 점심은 밖에서 구입해 오거나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 먹는다. 간단히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샐러드를 먹는데, 샐러드를 만들기 위해서 마당에 심어놓은 상추를 수확한다. 구례에 오자마자 심은 상추와 여러 가지 (이름 모를) 채소들은 굉장히 더디게 자란다. 오늘 전문가 아나를 불러 물어봤더니, 너무 성급하게 뜯어먹어서라고 했다. 얘네가 자랄 틈을 좀 줘!라고 말하면서 능숙하게 필요 없는 잎들을 정리했다. 아나가 준 가지 모종을 마당에 옮겨 심었는데 벌써부터 꽃이 피었다고 자랑했더니 가지를 먹고 싶거든 꽃을 따주라고 하면서 그 예쁜 꽃을 똑 따내고는 진딧물들을 정리했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캠핑의자에 조금 앉아있다가 백군은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나는 가방을 챙겨서 두 번째 외출을 한다. 두 번째 외출은 주로 도서관으로 간다. 도서관에서는 책을 읽거나 노트북을 가져가서 작업을 한다. 건물이 지리산을 닮은 매천도서관에 첫눈에 반해 여기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거짓말같이 자주 가던 빵집 사장님이 도서관 알바 자리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도서관에서 이제 막 시작한 길 위에 인문학이라는 강좌의 보조강사 역할이다. 하는 일은 출석체크와 동의서에 서명을 받는 것, 강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멘트를 하는 것, 렌터카와 여행보험 등을 알아봐서 예약하고, 교수님이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자료를 준비해 놓는 일을 한다. 아참, 수업 중에 사진과 동영상을 한두 장 정도 기록하는 일도 하고 있다. 이 정도의 일을 나는 지구에 처음 나무를 심는 임무를 받은 사람처럼 하고 있다. 교수님의 약력을 소개할 때 발음을 잘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연습하고, 렌터카에 가서 생전 처음 예산에 맞춰 가격 흥정도 했다. (심지어 성공했다!) 알바로 하는 강의는 한주에 한번 있어서 도서관에서 하는 다른 강의들도 전부 챙겨 듣고 있다. 그림 그리기, 인문학, 음악감상, 캘리그래피 수업은 격주로 있다. 세금을 야무지게 사용하는 나를 보고 (친구) 수진이는 세금 내는 게 아깝지 않다고 했다. 매우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어느때보다 만족스럽게 살고 있다.
오후 4시쯤 집에 돌아오면 일을 마친 백군이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구례 탐방을 시작한다. 가보고 싶었던 곳에 가보거나 무작정 드라이브를 하기도 한다. 보통 유명한 곳들을 추천받지만 유명한 곳에 찾아가는 길이나, 잘못 들어선 길에서 이름 모를 저수지 같은 곳들을 만나 마음을 잔뜩 뺏기고 만다. 이런 것들을 나만 보다니... 미안하고 아깝다. 열심히 셔터를 눌러봐도 그 아름다움은 반도 담아내지 못한다. 늘 이런 비겁한 변명이라니.. 서울에 핫한 카페들은 멋진 사진을 보고 가서 실망하는 경우도 많은데,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가선 보통 실제 풍경이 훨씬 더 좋다고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