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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영 Sep 25. 2023

사랑하는 당신에게

https://www.youtube.com/watch?v=2F9zio9fzv0&t=131s&ab_channel=Moston%26Vandy



사랑하는 당신에게


작년 여름 이후, 나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점철되었어요. 그 긴 기다림을 날씨로 비유한다면 덥고 습한 장마 그리고 혹독하게 추운 겨울뿐만은 아니었어요. 이따금씩 비치는 햇볕 덕분에 간신히 살 수 있었어요.


올해 여름은 유달리 한강 수영장에 자주 갔었어요. 온종일 뜨거운 태양 아래에 몸을 맡겼고, 사방에서 울기 시작한 매미들,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를 뒤편으로 한 채, 호홉을 머금고 물속으로 잠수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나의 여름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젊은 날, 나의 사랑도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이 미련한 나는 그대로 붙잡고 있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놓기가 싫구나. "


밤 하늘 산책길에서 본 수많은 별들, 귀 뒤에서 속삭이는 바람의 정령들조차도 마치 나에게 그만 놓아주라고 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 기다림 속에서 마주침은 있었고 나의 기다림을 끝까지 응원해 준 고마운 두 사람이 있었어요. 이들이 있었기에 나는 내가 사라지기까지 아니 지금껏 기다릴 수 있었어요.


지난 1년간, 나는 인생을 스스로 파괴했고 세상에서 가장 느린 자살을 시도했어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지옥을 경험했어요. 그렇게 그 시간을 황무지에서 살았어요. 밖을 나가기가 무서웠기에 일상을 포기해야만 했어요. 당신은 유령이 되어 내 삶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함께 자주 거닐던 서촌과 북촌, 메밀과 팥을 좋아하는 당신을 따라 방문했던 수많은 가게들, 광화문 뒤로 보이는 경복궁과 북악산, 당신이 일하는 회사의 로고는 어디를 가더라도 보였기에 광고판만 보더라도 심장이 무너졌어요.


네. 이것은 정신병이에요. 목 놓아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지만 그마저도 잘 안되어 왼쪽 눈에 슬픔이라는 상념만 맺힌 채 결국 눈물은 흘리지 못했어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고, 집 근처 절에 찾아가도 마치 쇠사슬로 단단하게 묶인 이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어요.


그리움은 얼마나 갈 곳 없는 마음인가요. 벙어리 마음, 눈 감은 마음, 그 마음에 입을 달아주어 회색빛 도시의 일상을 끝내고 지친 몸을 매트리스에 기대어 잠자고 있을 당신에게 예전과 같이 말을 건네주었어요.


"잘 자, 오늘 하루도 고생했어. 내일은 더 빛날 거야. "


이렇게 1년을 실체 없는 당신에게 말을 걸었어요.


재회를 바라는 붉은 마음. 가만히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어요. 그러면 그 애달픈 마음에서 집착을 발견할 수 있고 내 욕심을 발견할 수 있어요. 사랑한다는 마음은 참 묘한 것이라, 내가 당신을 참으로 깊이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 '나'라는 집착이 너무나 강하게 숨어있어요. 붉은 마음은 그대로 의미가 있고 아픔 또한 의미가 있어요. 당신이라는 잔잔한 호수에 사랑이라는 돌을 던져 가만히 지켜보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어린 왕자에 나온 말처럼 사막 어딘가에 숨겨진 오아시스 같아서 내 삶을 아름답게 하고 절절하게 하고 이 삭막한 도시에 아름다운 사람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해줘요. 그렇게 당신을 위해 신에게 기도를 간절히 드려요. 그러면 차분히 마음이 내려 놓아져 갈망이 풀려요.


매일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 자리에 봄의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다시 여름이 돌아와 하늘과 자연의 색이 선명하게 바뀌며 다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찾아왔으니 사계의 절정, 가장 아름다운 날, 지난겨울의 추웠던 기억은 온데간데없지만 잔향은 더욱 짙어졌어요. 하지만 계절이 순환하듯 다시 뜨거운 여름은 올 것이며, 결국 나는 일어설 것이이에요. 종말 뒤에는 늘 새로움이 있으니깐요.


나의 젊었던 육체와 영혼은 더 나이가 들 것이고, 조금씩 지혜가 쌓일 테니 이렇게 바보처럼 보이는 사랑의 열병도 어느 날이 되면 추억이 되겠죠. 사랑했던 사람이 지나가고 누군가가 내 곁에 오고 훗날 죽음이 찾아오고 그런 과정에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다시 마음을 잡으려고 일어서는 나 자신만 남을 테니. 이렇게 겨울이 가고 아름다운 여름이 찾아오듯 그렇게 새롭게 다시 털고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당신과 함께 갔던 장소에 메밀 꽃이 피고 졌고 이제 그 자리는 붉게 물든 백일홍이 가을볕 아래에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어요. 아름다운 사람은 마치 꽃과 같아서 같이 있으면 그 공간은 환하게 빛이 나고 그가 없더라도 잔향은 마음속에 진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에 위안이 돼요.


아름다운 꽃을 바라보듯 스스로에게 시선을 돌릴 때,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고 새하얀 빛만이 가슴에 가득해 저요. 사랑은 그대로부터 시작했지만 내 가슴에는 사랑만이 남았어요.


1년의 기다림 끝에 난 비로소 엉망진창이 된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나는 이제 이 열병을 최선을 다해 치유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용기를 내어 집 밖으로 나갈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에게 기도를 할 거예요. 진심으로 내 욕망과 집착이 담긴 기도가 아닌 진정 당신의 일상 속 안정과 행복 그리고 건강을 바라는 염원을.


나는 이제서야 당신을 떠날 준비를 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사랑하는 당신.


그리운 그해, 함께하지 못 한 여름,

메밀 꽃이 지고, 백일홍이 핀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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