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 아닐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억하며
2016년 12월 28일, 2박 3일의 포르투갈 리스본 일정 중 마지막 날이다. 포르투가 리스본보다 좋다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리스본은 3일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포르투는 실망스러웠고 리스본은 더 있지 못해 아쉬웠다. 포르투가 별로였던 이유에 대해서나 이번 여행 전체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만 그보다는 리스본의 좋았던 기억에 대해서, 3일 중에서도 조금 특별했던 마지막 날에 대해 기록해보려고 한다.
(사진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열흘 동안 함께 여행한 동행이 먼저 세비야로 떠나게 되어 공항에 바래다주고 호시우 역으로 돌아오면서 새삼 리스본 지하철역의 깔끔함―역이 깔끔한 것이지 지하철 내부까지 깔끔한 것은 아니다―과 디자인에 감탄했다. 우리나라 지하철역도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물론 훨씬 깨끗한 편이지만 리스본에 비해 미적 요소가 부족하달까.
호시우 역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오니 말 그대로 구름 한 점 없이 여행하기 딱 알맞은 날씨에, 아침 10시의 상쾌한 공기가 반갑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란색 타워크레인밖에 보지 못했던 것 같은데 오늘 하늘이랑 건물과도 잘 어울리는 파란색과 흰색 타워크레인이 마음에 든다. 타워크레인에게서 무섭고 칙칙한 느낌 외에 다른 긍정적인 인상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오늘은 리스본 시내의 동쪽 언덕을 둘러보기로 했다. 흔히 리스본에는 7개의 언덕이 있다고 하는데 이 '동쪽 언덕'은 상조르즈 성이 있는 언덕을 뜻한다.
누군가에게는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평범한 공간이 여행자의 눈에는 그저 새롭고 신기하다. 이곳 주민들 입장에서는 여기서 왜 빨래 널어놓은 남의 집 사진을 찍고 있나 싶을 것이다. 나 역시도 지금 살고 있는 말라가가 아름다운 도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린 후에는 무뎌졌는데, 여행으로 말라가에 오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면 평범한 장면도 신선하게 다가오곤 한다.
조금 더 올라가니 슬슬 이 동네(포르투갈어로 bairro)의 본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고작 하루 둘러보았을 뿐이라 이걸 '본모습'이라고 단정 짓는 게 조심스럽기는 한데, 여기에서 잠깐 샛길로 빠져보자면 여행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리스본의 본모습 혹은 뚜렷한 이미지를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구글에서 리스본 사진을 찾아보면 나오듯 한 나라의 수도 치고 랜드마크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도 없고 리스본 하면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트램? 나름 유명하고 신기하긴 하지만 글쎄, 리스본이라는 곳을 대표할 만한 상징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이 글의 커버 이미지도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가장 평범한 사진이 뽑히게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언덕만큼은 기억을 떠올리면 그려지는 이미지와 인상이 있다. 물론 단순히 공간에 의한, 그러니까 이곳을 방문하는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고정된 것들에 의한 요소들뿐 아니라 이날 이 시간에 나였기에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지극히 개인적인 결과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동네는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시내의 네모반듯 깔끔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그래서 나름의 매력이 있는 지역이다. 그라피티와 벽화와 공연 등 다양한 문화를 골목골목에서 만끽할 수 있고 자그마한 카페들도 눈에 띈다. 사진으로는 다 담지 못했지만 이곳의 분위기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서 언덕을 오르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실 이 언덕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상조르즈 성인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성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성 입구에서 이 연주를 듣고 여기서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로 작정했다. 마침 햇살이 잘 드는 벤치가 있었고 유명한 관광지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딱히 계획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즉흥적이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곡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루마의 River Flows In You였다. 지구 반대편에서 이 곡을 그것도 거리 공연으로 듣다니 신기한 일이다. 따뜻한 햇볕을 쐬며 이 아저씨의 연주를 들었던 순간이 이날 하루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았다.
이 당시 내 옆에는 한 무리의 청년들이 자신들의 공연을 하기 위해 피아노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팔찌 같은 수공예품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스페인어를 쓰는 것을 듣고 말을 걸었는데 이 사람이 콜롬비아인이라는 것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미국에 대한 욕까지 이야기를 나눌―사실 거의 듣기만 할― 수 있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아저씨가 떠나고, 기다리던 청년들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그 옆에서 콜롬비아인도 자리를 펴 장사를 시작했다. 배가 너무 고파 점심을 먹고 이 자리로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밥은 전날도 갔던 타임아웃에서 먹기로 했다. 언덕을 돌아 내려와 시내를 거쳐 테주 강을 따라 걸었다.
타임아웃은 리스본을 대표하는 푸드코트로, 생긴 지 몇 년 되지 않은 데다 맛과 가격도 양호한 편이고 무엇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식을 고를 수 있어 여행객들은 물론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리스본을 대표하는 음식인 대구 요리를 먹어보고 싶었는데 보이는 것처럼 주문한 메뉴가 대구 살이 감자와 섞여있는 형태라 생선 본연의 맛을 느끼는 데는 실패했다.
타임아웃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사람이 워낙 많아서 자리를 잡기 쉽지 않다는 것인데 전날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빈 곳 찾느라 꽤나 고생을 했다. 그렇게 겨우 찾은 테이블에는 신기하게도 전날 같이 앉았던 부부가 있었고 오늘도 우연히 함께 밥을 먹게 되었다.
다시 그 언덕을 올라가기 위해 리스본의 햇빛을 받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테주 강은 강이라는 것을 모르면 바다로 착각할 정도로 꽤나 넓고,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바다와 비슷하다. 해 질 무렵에 와도 좋고 낮에 와도 좋은, 리스본에 푹 빠지게 된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인 곳이다.
점심을 먹으러 내려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올라가기로 했다. 모든 경험이 그렇듯 여행도 다닐수록 내 자신에게 많은 변화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새로움에 대한 태도이다. 몇 년 전의 나였다면 익숙함을 이유로 내려왔던 길로 다시 올라갔을 것이 분명하지만 여행은 낯선 것이 주는 예상치 못한 기쁨을 깨닫게 해주었다.
상조르즈 성 앞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공연하던 청년들과 콜롬비아인이 이미 떠난 뒤였다. 밥을 먹으러 갔던 게 하필 콜롬비아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때여서 작별 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게 너무도 아쉬웠다. 허탈함을 달래고 아까의 좋은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 다시 그 벤치에 앉았지만 '당연히도' 그럴 수 없었고 옆 사람의 담배 연기를 견딜 수 없어 이내 곧 자리를 뜨게 되었다.
아쉬운 발길이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전망대였다. 마침 시간이 맞아 4월 25일 다리를 배경으로 이렇게나 아름다운 리스본의 석양을 볼 수 있었다. 만약 상조르즈 성 앞에 공연하던 청년들과 콜롬비아인이 그대로 있었다면 나는 이 풍경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행은 이렇게 새옹지마와 전화위복이라는 인생의 묘미를 또다시 가르쳐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역시 여태껏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곳을 거쳤다. 포르투의 을씨년스러운 골목들과는 달리 이곳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후에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인상을 준다.
좋은 영화를 보고 멋진 노랠 들을 때 보여주고 싶어서, 들려주고 싶어서 전화기를 들 뻔도 했다는 김동률의 노래를 오늘따라 나도 모르게 계속 흥얼거렸는데 내 기분이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사진과 글로 이날의 느낌을 담아내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도 부족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고 함께 왔으면 좋았겠다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리스본은 언젠가 꼭 다시 오겠다고 이날 다짐했다. 포르투갈어를 배워서 긴 일정으로 여유롭게 있을 생각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리스본의 마지막 날이지만 영영 마지막은 아닐 그런 날이 저물었다. 행복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버스는 다음 목적지인 스페인 메리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