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싶은데 일하기 싫다
지난했던(?) 이력서 들이밀기와 거절을 수차례 반복한 후,
다시 일하게 된지 어언..일주일째다. 기존 일했던 방송국에서 다시 일하게 됐다. 마침 내 이력서를 보고 주변에 평판 체크를 한 담당 팀장이, 같이 일해보자고 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얘 어떠냐" 물어본 사람이 나와 꽤 오랜 시간 일했던 분이었는데, 그분에게 엄청난 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또 공교롭게도 엄청난 추천을 해준 그분이 내 프로그램을 맡게 돼 또다시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와 꽤 오랜시간 일했던 그분이 아주 정평이 난 '워커홀릭'이라는 점이다. 방송에 대한 열정은 감히 내가 따라갈 수도 없이 너무나 어마어마한지라 그냥 허투루 넘어가는 일이 없다. 솔직히 이건 힘빼도 되는 부분 아닐까, 밀리고 쌓인 일이 한트럭인데 왜 이런것까지?! 하는 생각이 하루에 수십번도 더 드는... 오죽했으면 내가 남편에게 "나니까 (같이) 했지"라는 말을 달고 살았을까. 하지만, 그 지독한 워커홀릭이 나를 적극 추천했다면 나도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왔을터.
워커홀릭 답게, 나는 투입과 동시에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리 시작된 업무로 나는 계약서도 아직 건네받지 못한 채 집에서 섭외를 하고, 질문지를 쓰고, 아이템을 찾는다. 당장 다음주부터 방송이 나가야한다는데 어쩌나, 계약서 받기 전까진 일 안합니다 기다리기엔 내 배짱이 너무 작다.
방송작가라는 일은 대부분 글을 쓴다기 보다는 스케쥴 조율과 아이템 선정, 기타 등등의 잡무로 이뤄지는 것 같다. 완전히 쌩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그러니까 드라마나 시나리오 작가처럼 '창작'이 주인 것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물론 프로그램 특성 따라 다르다).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안나오는 번호를 찾을때에는 흥신소를 방불케 하기도. 여튼 오랜만에 섭외를 하고 스튜디오와 패널 시간을 퍼즐처럼 이리저리 맞추고, 전혀 모르는 분야를 공부하며 질문지를 쓴다.
늘 하던 일이다. 아니, 오히려 늘 하던 일보다 체력적으론 쉬울지도. 프로그램 특성상 재택이 대부분이라 녹화날을 빼면 모두 집에서 일할 수도 있고, 매일매일 생방 섭외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하나하나 유난히 더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오는 것은 왜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붕 뜬다. 밖에서 엄마가 아기와 씨름을 하고 있거나, 갑자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린다거나 유난히 찡얼댄다거나 하면 마음은 콩밭으로 간다. 동시에, 12키로짜리 아이를 업고 있을 엄마의 다리 관절도 걱정이 된다. 가끔 아이가 걸음마보조기를 잡고 우다다 달려와 내방 문을 쿵쿵 두드리면 어쩔수 없이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 차라리 눈에 안보이면 더 나을까. 오히려 재택하면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을 것 같아 지원했건만, 이거 생각보다 쉽지않다.
글쎼, 한마디로 일과 여가...정확히 말하면 일과 육아의 분리가 전혀 안되는것만 같다. 예전에는 매일 출근해야 헀기에 몸은 힘들었으나, 출근한 시간동안 빡세게 일을 하고 집에 오면 모든 퓨즈를 꺼둘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집은 오롯이 쉬는 공간으로써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는 홀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집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잠깐 틈나는 시간에는 아이의 밥을 먹이거나 놀아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워커홀릭의 열정은 낮이든 밤이든 주말이든 카톡을 울려댄다. 평일 출근이 정해져있던 예전에는, 주말에 연락이 오면 아주 비상사태가 아닌 이상 아예 답장도 안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도 아니라서 이게 참 애매하게 굴러간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일때는 후다닥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넌다. 그리고는 얼른 노트북 앞에 앉아 질문지를 쓰거나, 섭외를 하는 것이다. 맥이 끊겼다가 다시 일을 하니 뭔가 집중력도 더 떨어지는 것 같다. 이것도 녹화 후에 후반작업을 하기 전이라 그나마 여유가 있는거지, 후반작업까지 몰리면 어떨지.
아이러니다. 한때는 그토록 하고싶던 복직이었는데, 오래오래 일하고 싶어 울부짖었는데,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도망치고 싶어지다니. 나는 일과 육아 그 중심에서 자리를 잘 잡을거야, 속으로 생각했는데 너무 자신만만한 소리였다. 정말 감사하게도 엄마가 아기를 봐주셔서 그나마 이정도였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아기가 아프거나, 유난히 컨디션이 안좋거나 한 날에는 또 어떨까. 생각이 또 꼬리에 꼬리를 문다. 쉴때 아이와 놀러다녔던 곳들도 괜히 아련하다. 남편은 일 특성상 주말에 시간을 내기 힘들기 때문에, 내가 일을 조율하거나 그만두지 않는 이상 단란한 가족나들이도 한동안 힘드리라...
인정한다. 지금의 나는 일에도 육아에도 마음의 여유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워킹맘이라는게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얼마전 아기를 낳은 친구에게 이런 하소연을 했다. 일을 빨리 시작하게 됐는데 애도 보고 일도 하려니 죽을 맛이다, 워킹맘들 정말 존경한다...그랬더니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야 나는 워킹맘이 아니라, 그냥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럽다. 기저귀 가는 것부터 쩔쩔매는 친구에겐, 이세상 모든 엄마들이 신처럼 보이는 상태인 것이다.
지금 나에겐 선배 워킹맘들이 신처럼 보인다. 이세상 수많은 이들이 엄마임과 동시에 일을 하는 여성이니, 그래서 그냥 다들 하는거구나, 했는데 내 일이 되고 보니 세상 어렵다. 한명 낳고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도대체 둘째 셋째 낳고 멋지게 일하는 여성들은 얼마나 대단한건지. 복직을 하고 나니 완벽하게 사라진 내 휴일이 그립고, 일과 여가가 완벽히 분리됐던 삶이 마치 전생같이 느껴진다. 글쎄, 이것도 적응되면 차츰 무뎌지려나. 기왕이면 빨리 내 마음이 단단해지길, 이 적응기간을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지나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