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첫 낙상사고
빼박 삼십 대 중반이 된 지 어언 3개월이 지난다.
살다 보니 서른넷 됐고 살다 보니 애엄마가 됐다. 나는 점점 늙어가지만 이제 돌 지난 나의 아이는 너무나 아름답고 찬란하게 성장 중이다. 뒤집기와 네발기기를 넘어서 이젠 짜박짜박 제법 잘 걷는다. 다들 혼자 크는 줄 알지만 이들의 성장에는 부모의 뼈를 깎는 희생이 뒷받침된다. 나도 이제야 알았다. 내가 잘나서 혼자 이만큼 큰 줄 알았지만 나 또한 먹고 자고 싸는 모든 일에 부모의 희생을 깔고 세상살이를 시작했음을 말이다.
참 힘겨우면서도 아름다운 나날들을 돌이 지날 때까지 잘 달려왔건만, 우리에게도 지독한 돌치레가 다가왔다. 하루는 밤에 열이 39도 가까이 나길래 아이를 소아과에 데려갔더니 목감기 초기랬다. 해열제와 약을 타서 꼬박 먹이고 이틀이 지나니 아이는 컨디션을 많이 회복했고, 비록 온몸에 열꽃이 폈지만 열은 내렸기에 나름 선방(?)한 돌치레라 생각했다.
문제는 저녁에 터졌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육퇴를 준비하던 순간, 아이가 침대에 눕혀도 한 시간째 잠을 안 자서 할머니와 내가 번갈아 투입돼 씨름하던 그 밤. 잠깐 할머니가 화장실 간 사이, 침대 가드에 서서 할머니 가지 말라며 대성통곡을 하던 아이가 돌연 가드가 터지면서 바닥으로 곧장 추락했다.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안아 올렸는데 아이는 이미 울음을 넘어서 경끼를 일으키고 그새 이마는 핏기 가득한 멍이 부어올랐다.
자크 식으로 된 가드가 아이 체중을 지금껏 견뎌오다 낡은 건지 툭 터져버렸고 하필 그 부분은 쪽문처럼 나무살 가드가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마치 골에 헤딩하듯 이마가 강마루 바닥으로 내리 꽂혔으니...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죄책감과 황당함으로 손이 벌벌 떨렸고 그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뇌리에 남아버렸다.
나 같은 것도 엄마라고.
차라리 좀 더 딴딴한 내 머리가 깨지고 말지 연두부 같이 몰랑한 아이의 이마가 시뻘겋게 부푼걸 보니 나에 대한 증오가 솟구쳤다. 내가 손이 조금만 빨랐더라면, 그냥 처음부터 업어서 재웠더라면, 심지어 ‘할머니가 화장실에 가지 말았더라면’까지.. 오만가지 가정이 나를 덮쳤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아이가 쳐지는 기색 없이 금세 컨디션을 회복해 오밤중에 춤추고 걸음마 하고 사방을 쏘다녔다는 것... 결국 거실에 아이를 다독여 재웠는데 아프고 많이 놀란 데다 늘 자던 공간도 아니어서 두 시간에 한번 꼴로 깼다. 남편과 나와 할머니가 돌아가면서 아이 곁을 지켰다. 거의 날밤을 새고 다음날 소아과로 달려갔더니 지금 컨디션으론 괜찮은 것 같다며 잘 관찰해 보고 이유 없이 쳐지거나 종일 울고 보채면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다행히 아이는 이마에 피멍자국만 남기고 건강히
회복했다. 대신 나에게 지독한 감기가 찾아왔다. 아이에게 옮은 건지 목이 좀 아팠는데 낙상 후 밤을 새우면서 목감기가 심해진 탓이다. 이비인후과를 갔더니 목이 심하게 부었다며 내시경을 권했고 항생제를 전보다 두 배 센 용량으로 지어줬다.
항생제를 3일 내내 먹고 다음날, 저녁으로 월남쌈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등이 살짝 가려웠다. 자는 내내 긁다가 아침에 일어났더니 등짝에 핏자국이 보였다. 피가 나게 긁은 것이다. 곧장 피부과로 달려가 항히스타민제를 처방받았는데, 그날 밤에 온몸이 완전히 뒤집어져서 전신에 반점이 다다다 생겼다. 너무 긁어서 온몸이 불채찍이라도 맞은 양 부어올랐다. 귓바퀴와 귓속까지 두드러기가 올라 시뻘갰다. 피부과에 달려가니 간호사의 헉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차라리 목구멍이 허는 게 백번 낫구나..
가렵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이번에야 제대로 깨달았다. 미칠듯한 가려움은 주사로도 약으로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고 불면의 밤이 지속됐다. 잠은 안 오고 새벽은 길고... 자꾸 얼마 전에 본 정유미 이선균 주연의 ‘잠’이라는 영화가 생각나 무섭기까지 했다.
너무 간지러워서 시원한 물병을 끌어안고 자거나, 추운데 발가벗은 채 거실에서 얇은 모달이불로 등을 지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시원하면 좀 덜 가려운 느낌이 들어서였다. 원인은 항생제인지 아님 피부과 약인지 음식인지 진드긴지 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내 몸의 면역력이 엄청 무너졌구나, 아이의 낙상 복직 등의 이유로 스트레스가 극한에 다다랐는데 이게 몸으로 터져 나온 것만은 확실. 나 이렇게 스트레스에 예민한 개복치였던가.
다행히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많이 나았다. 물론 이틀 뒤 또 약을 타러 가야 하지만, 온몸을 뒤덮은 붉은 반점들은 거무튀튀하게 변하더니 대부분 사라졌다.
잠깐 잃어보면 깨닫는 소중함이 가장 크게 다가오는 건 바로 건강이다. 간지러움이 사라지니 기분도 나아졌고, 나를 괴롭히던 죄책감도 동시에 덜해졌다. 이상하게도 일도 안정적으로 굴러가든 듯하고, 여하튼 우왕좌왕하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평정을 조금은 찾은 듯하다. 역시 몸과 마음의 건강은 한 세트인 걸까. 지독히 앓고 난 뒤에 몸이 회복기에 들어서며 정신까지 건강해지는 이 느낌...
아이는 보통 아프고 나면 쑥 큰다고 한다. 아이뿐 아니라 나도 이번에 아프고 나서 조금은 큰 느낌이다. 앞으로 아이에 관한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많겠지, 조금씩 겪어가며 하나씩 내려놓기로 한다. 작은 것에 매달려 종종거리지 말자. 깊이 자책하지 말자. 조금은 의연해지자... 건강만 하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좀 다스려본다. 올해 목표는 애도 나도 건강하기, 그것 하나로 족한다. 부디 이 지독했던 돌치레로 올해 모든 액땜을 다 한 것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