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여행지는 호기심이 컸던 맥레오드간즈다. 티벳족이 많이 살고있는 곳이라 인도 안에서도 또 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한가지 걸리는건 위치가 너무 북쪽이라 멀었다. 마날리에서 다시 5-6시간 걸려 만디로 내려갔다가 만디에서 마날리와 다른 갈래로 8-9시간 올라가야했다. 게다가 다음 여행지인 리시케시까지는 구글맵 기준 차로 10시간이다. 버스로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다. 뒷일을 제치고 생각해도 지금 여기서 맥간을 가는데 순수 버스 이동시간만 15시간. 이렇게 비효율적인 이동을 하면서까지 가치가 있을까. 갈팡질팡한 마음으로 네이버에 맥레오드간즈를 치고 이미지로 카테고리를 옮겼다. 스크롤을 몇 번 내리지않고 샘에게 말했다.
“우리 맥레오드간즈 가자”
- 티케(오케이). 와이낫? 코이띠까네이.
배낭이 가득찼음에도 야금야금 옷을 샀던 탓에 우리 가방은 당장 터진다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샘은 마날리에서 맥레오드간즈를 가기 위해 돌아가야하는 마을에 본인의 친척집이 있다며 거기에 필요없는 짐을 맡기고 1박을 하고 가자했다. 본인이 좋아하는 친척집이라며 바로 연락을 했다. 우리는 몇시간을 걸려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내려갔다. 마날리를 올라올 때 들렸던 만디라는 곳으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만디에는 여전히 구걸하는 사람이 많았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아이부터 어린 엄마, 노인까지 다양했지만 원하는건 같았다. 그들은 돈만 원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쥐어주지 않는다. 당장 그들이 필요한건 먹고 잘 수 있는 가치를 교환하는 돈이다. 하지만, 돈을 주면 누군가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위험성이 있다. 아니, 솔직해지자. 그들이 이 돈으로 먹고 자는데 쓰는게 아니라 마약이나 술처럼 다른데 쓸지도 모른다는 마음 깊숙히 불신이 있다. 아, 조금 더 솔직해지자. 그들이 이것만 배워서 먹고살길 바라지 않는 욕심이 가장 크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돈 대신 먹을걸 건네준다. 갖고있는 과일이나 과자를 꺼내 내어준다. 대부분 아이들을 제외하고 크게 좋아하지 않는다.
만디에서 구걸하는 아이가 내 옷을 여러번 당기며 돈을 달라고 했다. 서울 지옥철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몸이 닿는 경험은 해봤지만 누가 내 옷을 억지로 당겨가며 요구한 일은 없었기에 불쾌했다. 의도가 어떻든 내 몸과 옷에 허락없이 손을 대고 거절을 했는데도 계속 따라다니며 똑같은 행동을 하는게 기분이 좋을리 없었다. 보통 관광객들은 그렇게 따라오면 끝까지 모르는척 무시하거나 지갑에서 돈을 꺼내 빠르게 상황을 종료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후자가 더 많은 편이라 그 아이는 더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사람을 괴롭히는게 익숙한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이렇게 행동할수록 아무것도 주고싶지 않다. 그럼 이 아이는 매번 사람들의 옷을 잡아당기며 10루피를 벌건가. 거절을 무시하고 가여운 마음을 이용해 본인이 원하는걸 강요할건가. 그 순간 질려버려서 아이를 피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걸 본 샘이 아이를 붙잡았다. 헤이헤이! 나를 돈 많은 외국인으로 생각하던 아이는 나만 졸졸 쫓아다니다 샘이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샘은 아이에게 다가가 눈높이에 맞춰 앉아서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싫다고 했는데도 자꾸 이렇게 쫓아다니면서 옷을 잡아당기는건 잘못된 행동이야. 너가 원하는걸 사람들이 항상 주지않아. 그걸 주고싶지 않은 사람도 있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야. 너는 그걸 받아들일 줄 알아야해.”
말로만 보면 동화적인 이야기 같아서 아이가 어쩌라고 퉤- 하고 도망갈 것 같은데 그들은 꽤나 이야기가 잘 통했다. 아이는 잘못을 저질러 부끄럽다는 눈빛과 몸짓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내게 미안하다고 말해줬다. 9살정도 밖에 안 된 아이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부끄러워졌다. 나는 아이가 앞으로 잘 살길 바라면서도 그 순간 피곤하고 귀찮아서 피할 생각만 했는데, 샘은 소년이 정말 잘 살아갈 수 있게 노력을 하는구나. 샘은 아이에게 맛있는것 하나 선물하자며 내게 제안했다. 슈퍼 가판대에서 아이에게 뭘 먹고싶냐고 물어봤고, 아이는 10루피짜리 과자를 골랐다.
그 모습을 본 어떤 할머니가 다가왔다. 할머니에게 오렌지를 건넸다. 할머니는 실망하는 눈빛으로 오렌지를 챙긴 후 구걸하는 다른 할머니와 이러쿵 저러쿵 얘기했다. 그 모습을 본 샘은 헛웃음을 지었다. 오렌지를 받아간 할머니는 “쟤네는 돈을 안 써. 자기들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애들이야. 저기 근처에 얼씬도 마” 라고 우리 욕을 했다고 한다. 뭐, 원하는걸 얻지 못했으니 화날 수 있지. 그래도 그 많은 사람 중 뭔가를 준 사람은 나 뿐인데, 주고도 욕 먹어야하는 생각에 괘씸했다. 인도에 또 다시 질려하는 중 샘이 말했다.
“난 이런 인도 문화가 너무 싫어. 구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구걸할 수 있지. 근데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않아. 끝까지 따라와서 옷을 잡아당기고, 원하는걸 주지않았을 때 욕을 하거나 화를 내. 사실 돕는게 의무는 아니잖아. 노인들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은 당연히 도와줘야하지만 신체 멀쩡한 사람들이 저렇게 손바닥만 내밀면서 돌아다니는걸 보면 화가나. 왜 노력을 안하지?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텐데. 왜 저렇게만 사는지 이해가 안 돼. 저런 사람들이 있어서 인도가 발전이 없는 것 같아.”
샘은 어려서부터 더 넓은 도시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일에 치여서 제대로 밥을 챙겨 먹지도 못하고, 그곳에 친구나 가족도 없어서 더 힘들었다고 했다. 본인도 그 힘든걸 버티며 커왔기 때문에 충분히 일할 수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 극도로 답답해한다.
함께 한달정도 여행하면서 본 샘은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인도 문화나 환경을 멋대로 평가할 때 샘은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특정 사람을 가리키며 인도 사람들 다 이런식이냐고 막무가내로 분노할 때 샘은 여기 인도야. 이 한마디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긴 사람 많은 인도라서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의미였다. 히얼 이즈 인디아. 이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유연하게 넘기는 사람이었다.
샘은 어디에서든 친구를 만들었다. 꽃이나 양말을 파는 아이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이름이 뭔지 몇살인지 물어봤다. 샘이 말을 건네기 시작하면 처음에 수줍어서 쭈뼛대던 아이들도 금새 보조개를 보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힌디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샘과 아이들의 미소를 보며 무슨 얘기를 저렇게 예쁘게 하나 늘 궁금했다. 아이들과 한마디 두마디 주고 받다보면 촛불 하나처럼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더 모였다. 쭈뼛대던 아이들은 학교 쉬는시간처럼 금새 시끌시끌해졌다. 아이들이 파는 물건을 사지 않아도 샘은 인기쟁이 교사처럼 주변에 아이들이 모였다. 샘이 사지 않는다 했지만 그 와중에 끝까지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에게는 진짜 선생님처럼 교육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원하지않을 때에도 끝까지 따라가고, 옷깃을 잡아당기는 행위에 대해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 종종 영어를 조금이라도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같이 영어를 가르쳤다. 영어를 계속 연습해서 나중에 꼭 써먹으라고. 어떻게든 도움이 되니까 까먹지말라고 같이 단어를 외우고 영어를 내뱉었다.
이토록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인데 무작정 손바닥을 내밀며 대가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차가웠다. 특히, 8-9살 아이들이 아닌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들에게 더욱 그랬다. 본인의 경험을 떠올렸을 때 하고싶지는 않지만 할 수 있는일이 많다는걸 알아서일까. 선택할 수 있는 나이인데도 어려서부터 해온 손바닥 내밀기에만 집착하고 있으니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아지는 샘이였다.
버스정류장에서 10분정도 걸어가니 조용한 동네가 나왔다. 동네 슈퍼와 몇개의 집을 지나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니 대문이 활짝 열린 집을 만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샘은 친척에 대해 알려줬다. 어머니가 어떤 계기로 말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인도 속사정은 잘 모르나 당황하지 말라고 미리 말해줬다. 집에 도착하자 두명의 자매와 어머니가 수줍은 웃음과 함께 환영해줬다. 자매인줄 알았는데 그들은 친척관계라고 했다. 둘 중 한명의 어머니는 도시로 일을 나가서 친척집인 이 곳에서 생활하는거였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생활이 바쁠 때 친척집에 아이를 맡겨서 사촌과 함께 생활하는 상황이랄까. 짐을 내려놓을려고 집을 둘러보자 몇개의 방이 보였다. 그 중 하나는 우리가 쓰게 될 방이였다. 넓은 마당과 꾸며놓은 화단이 있었다. 마당 한 구석에는 우리를 위해 모닥불을 준비해두었다. 어머니는 우리가 편하게 앉을 수 있게 의자를 마련해두고 딸에게 비스킷과 차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자매는 꽤 수줍음이 많은 고등학생이어서 왁자지껄한 분위기보다는 침묵이 지배적인 대화였다. 그녀들은 블랙핑크를 좋아해서 한국 영상도 찾아보는 10대들이였다. 블랙핑크 노래를 아냐며 몇가지를 들려줬는데, 그런 면에서 워낙 관심없었던 나는 유명한 붐바야 외에는 아는게 없었다. 나보다 더 블랙핑크 그룹이나 노래에 대해 훨씬 많이 알았다. 블랙핑크 얘기를 할 때 흥분해서 활발해지는가 싶더니 조금 지나자 다시 수줍어하는 10대 소녀로 돌아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침묵과 몇 마디가 오갔다. 어머니는 배고플 우리를 위해 저녁 준비하느라 바빴다. 저녁 준비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배고플까봐 차와 간식을 계속 내주었다. 나는 이렇게 대접받기만 하는게 미안해서 우리가 사온 과일을 직접 깍을까 했지만, 손님 대접에 적절한 방식이 아니였으므로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게스트 이즈 골드. 손님은 주방 출입금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다.
어머니가 아예 목소리를 못 내고 수화로 얘기할 줄 알았는데 “으으”라는 목소리를 내며 말을 건넸다. 자매가 어머니의 말을 알아듣고 샘에게 알려주면 샘은 영어로 내게 다시 통역해주는 방식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물론 자매나 어머니가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서 눈빛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며 어깨와 등을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어줬다. 잘왔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호기심과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샘이 좋은 친구와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저녁 준비를 기다리면서 소녀들과 나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본인들이 유투브에서 본 한국 일상을 얘기하며 실제로도 그렇냐고 물어봤다. 나는 미디어는 미디어일 뿐이라며 실제와 다른 부분과 같은 부분을 집어서 얘기해줬다. 조만간 한 소녀의 생일이라 가족끼리 보내냐고 물어봤더니 친구들끼리 동네를 벗어나 놀거라고 말했다. 이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읍내로 나가 본인들끼리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보내면 어떤 느낌인지 알지 않냐면서 얘기할 때는 영락없는 10대 소녀같았다. 서로 이야기거리가 늘어날수록 꺄르륵하는 순간들은 많아지고, 이곳으로 나를 데려온 샘의 얼굴은 흐뭇해보였다.
해가 지고 추워지자 어머니는 더욱 분주해졌다. 밥을 밖인 모닥불 옆에서 먹을지 방에 들어갈지 물었다. 어두운 밤과 모닥불 옆 낭만적인 식사를 원했지만 부엌에서 왔다갔다하는게 아무래도 번거로울 것 같아 방 안에서 먹자고 했따. 우리는 과연 손님이었따. 가장 따듯한 자리에 우리를 앉혔다. 우리가 앉자마자 금방 완성된 음식들이 나왔다. 같이 밥을 먹는줄 알았는데 우리가 먹는 양만 나와서 자매에게 같이 먹자고 했더니 괜찮다며 분주하게 부엌으로 간다. 샘도 같이 먹자고 권유했지만 알겠다고 대답하고 같이 먹지않는 자매를 이해했다. 나는 어리둥절해 여러번 권유했으나 수줍은 대답을 보고서 샘에게 물었다.
“우리 같이 먹는거아니야? 우리만 먹어? 왜?”
- 손님이라서 그런것같아. 우리가 먹어야 가족들도 먹을 수 있을거야. 일단 먹자.
우리가 먹기 시작하자 어머니와 자매도 밥을 갖고 와서 다른 자리에서 먹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요리는 내가 인도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밥이였다. 찜닭같은 요리였는데 간장버전도 고추장 버전도 아닌 오리지널 버전의 찜닭이었다. 샘은 프라이드 치킨이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아는 후라이드 치킨은 기름에 바삭하게 튀긴건데, 여기서 말하는 프라이드는 기름에 조리한 닭을 볶듯이 만드는거였다. 기름에는 다양한 향신료가 들어갔을텐데 전혀 이질감이 없었고, 너무 느끼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시는 편인 것 같다. 모든게 적당했다. 적당히 매콤하고 기름지고 풍만한 향과 잘 삶겨서 탱탱한 고기 식감이였다. 그 이후로도 그렇게 맛있는 집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나는 진심을 담아 인도에서 먹은 것 중 최고의 맛이라며 쌍따봉을 여러번 외쳤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끊임없이 찜닭을 주셨고, 나는 배터지기 직전까지 먹었다. 우리나라처럼 식사로 끝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다시 차와 비스킷을 내어주셨다. 배부르니 본능적으로 잠이 쏟아진 나는 잘 수 있는 방으로 가고 싶었는데, 샘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샘에게 이제 그만 자러가자며 눈치를 줬는데 모르는척 했다. 힌디어를 전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대화는 딱히 없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티비를 멍하니 보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나는 이만 가보겠다며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땡큐떙큐. 굳나잇. 샘은 나의 돌발행동에 당황했지만 금새 정신을 차리고 혼자 맥간 가냐며 장난을 쳤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 간단하게 씻고서 짐을 다시 풀었다. 내일 아침 분명 후회하며 다시 싸겠지만 일단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서 모든 짐을 꺼냈다. 마날리에서 샀던 라면을 발견했다. 가족에게 받은 환대에 어떻게든 갚고 싶었다. 내가 가진 라면 2개 중 1개를 따로 빼두었다가 에잇, 하고서 마저 다 꺼냈다. 내일 떠나기 전 선물로 드리면 얼마나 좋아할까. 블랙핑크 영상을 찾아보면서 라면 본 적이 있을지도 몰라. 혼자 설렘 가득 안고서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 6시도 안 되어서 우리는 일어나 짐을 쌌다. 오늘 가야하는 맥간은 꽤나 먼 거리였다. 140km가 떨어진 거리라 구글맵 기준 5시간정도가 나왔다. 그럼 인도 프리미엄으로 9시간 정도 잡아야한다. 밤에도 계속 똑같은 버스를 타고 전전긍긍할 자신이 없었다. 분주하게 배낭을 챙기는데 어머니가 밥 먹고 가야한다고 붙잡았다. 자매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 어머니를 도왔다. 어제 먹었던 그 찜닭 한 상이 차려졌다. 내가 어제 너무 먹어서 몇개 안 남은 닭고기는 내 그릇으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도 우리 그릇은 따듯하고 푸짐했다. 어머니와 자매의 그릇에는 고기없는 국물과 밥, 짜빠띠가 있었다. 차까지 든든하게 마시고서 마저 배낭을 들었다. 자매는 구글 번역기를 한글로 설정하고 나에게 보여줬다. 화면을 보고서 나는 빌꿀빌꿀. 아윌미슈. 땡큐쏘머치. 를 외치며 걸어갔다. 걷다가 혹시나 뒤를 돌았는데 그들은 대문앞에서 여전히 손을 흔들고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며 이 순간을 오래오래 기억해야지 생각했다. 가족이 보내준 무조건적인 환대와 지지는 내 마음속에 오래 머물렀다. 자매가 수줍어하며 보여준 구글 번역기 화면과 눈빛과 포옹으로 나를 감싸주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집이 그립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