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볕이 더 잘드는곳으로 방을 바꿨다. 호스텔 주인은 젊은 커플이였는데 히피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일주일정도 있을테니 숙박비를 네고해달라는 말에 흔쾌히 코이띠까네이를 외쳤고, 히피 계산법에 의해 반내림하여 값을 받았다. 아침에 일어나 로비와 테라스로 가보니 술병과 먹다 남은 과자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폐타이어를 예쁘게 페인트칠해 의자로 만들었고, 버려둔 가구를 재활용해 공간을 꾸몄다. 부엌에는 안 쓰는 박스를 몇겹 겹치고 그림을 그린 모빌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벽으로 쓰이고있는 판넬도 페인트칠하고 숙박객들이 자유롭게 방명록을 남길 수 있게 매직을 준비해뒀다. 개인이 운영하는 호스텔에 온 것 같아 좋았다. 시설이나 시스템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듬뿍담은 공간에서 먹고 잘 수 있다는 사실이 날 설레게 만들었다. 부엌도 마음껏 쓸 수 있게 해줘서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호스텔에 부합했다. 그들은 오래된 건물을 임대해서 몇달간 꾸몄고 운영한지 1년 안 된 신생 호스텔이였다. 나중에 테라스와 로비를 카페로 바꾸고 싶어했다.
호스텔에는 태어난지 얼마 안된 강아지 라히가 있었다. 라히는 아기인데다 깨방정 성격이라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녔는데 그 모습마저도 귀여워서 숙박객들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호스텔 특성상 젊은 친구들이 많이 보였고 대부분 인도 내국인이였다. 델리에서도 신기했다. 보통 호스텔을 가면 외국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편인데 내가 간 숙소에서는 항상 외국인보다 내국인 비율이 높았다. 같은 나라인 룸메이트끼리 얘기를 나눌때도 서로를 신기해했다. 어떤 지방에서는 차를 짜게 먹고, 어떤 곳에서는 차를 뜨겁게만 먹었다. 생김새, 식문화, 계절, 억양, 문화가 달랐다. 그들은 각자가 지내는 지역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온 내 경험을 듣는것처럼 새로워했다. 아, 인도는 얼마나 넓은건가. 하긴 북인도에서 이렇게 추워도 남인도는 계절이 반대라 지금이 성수기다. 한 나라 안에서 어떤 곳은 춥고 다른 곳은 따듯하다니. 이럴때마다 어딜가도 사계절이 같은 우리나라는 작고, 인도는 참 넓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머무는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작고 소박하면서도 카페가 여러군데라 그 날 기분에 따라 입맛대로 원하는 공간을 선택할 수 있었다. 30분정도 걸으면 조금 더 큰 마을로 나가 다양한 음식점과 시장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유명한 사원도 그 쪽에 있었다. 우리가 머무는 마을에서 10분정도 걸어가면 큰 폭포와 트래킹할 수 있는 산이 있었다. 딱 한가지 흠이 있다면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으르렁거리고 짖어대는 떠돌이 개들이였다. 유독 영역싸움이 심한건지 개들은 밤새 으르렁거리며 너도 나도 우리 모두 함께 잠들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유독 맥간이 평화롭게 느껴졌는데 모든게 낯설었던 환경에서 익숙함을 만나서였을까. 길거리가 정말 깨끗했다. 다른 인도와 다르게 쓰레기통이 곳곳에 있었다. 분리수거를 할 수 있는 통이 여러군데 있었고, 리사이클링 하자는 캠페인 문구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티벳족은 중국에서 고유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역사가 긴 소수민족이다. 지속적으로 독립을 요구했으나 중국에서는 인정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핍박하고 억압해왔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일제시대때 많이 당했던 것 처럼 정도가 심한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 스님, 일반인 관계없이 티벳족의 독립을 요구하는 분신투쟁도 많이 일어난다고 했다. 더이상 버틸 수 없게되서 티벳족은 인도 맥간으로 임시정부를 옮겨서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직위를 갖는 달라이라마가 이 곳에서 지내며 설법을 하는 사원도 있다. 그래서 이 동네를 걷다보면 승려복을 입고 다니는 티벳족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얼굴은 한국인과 비슷해서 나는 코..코리안? 이라고 물어보고, 그들은 내게 티..티벳..?이라고 운을 떼기도 한다. 여기저기서 리사이클링 하자는 캠페인 문구와 달라이라마 얼굴을 볼 수 있다. 서점이든 옷집이든 대부분 상점에는 달라이라마 사진이나 그림이 걸려있다. 티벳 음식점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어딜가서 먹든 꿀맛이었다. 만두국같은 뗌뚝부터 진짜 맛있는 모모(찐 만두)를 먹을 수 있었다. 매일 걷는 거리와 그 곳에서 보이는 사람들과 먹는 것까지 모든게 다 익숙해서일까. 아니면 달라이라마 아래 하나의 공동체 라는게 느껴져서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졌을까.
맥레오드간즈는 진짜 인도의 매력을 아는 사람만 오는 곳이야. 라는 마이너한 사람들간 유대감같은 믿음이 있었다. 델리 호스텔에서 각자 어디를 여행하는지 이러쿵 저러쿵 떠들며 바라나시, 마날리, 리시케시와 같은 지명을 얘기하면 누가 들어도 알기때문에 예스 예스. 오브콜스. 이런 반응인데, 맥레오드간즈, 케랄라처럼 관광객이 많이 듣지 않았던 지역을 얘기하면 애들의 눈빛이 바뀐다. 올, 짜식, 좀 하네? 이런 눈빛으로 거기 좋다고 듣긴했어. 거긴 어떻게 갈거야? 라며 흥미를 가진다. 델리 뿐만 아니라 북인도에서도 나 나중에 맥간 갈려고. 이러면 오, 너 좀 아네? 이런 눈빛으로 인도에 몇 번 와봤냐는 질문을 받게된다. 괜히 어깨 우쭐해져놓고 아닌척 “아니. 이번이 처음인데!” 당당하게 외치던 내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맥간은 지리적으로 인도의 북쪽에 있는데다 그 위로 더 여행할 관광지가 없다. 그래서 맥간을 간다는건 선택과 집중의 개념이 크다. 거기 갔다가 다른데 더 들릴 곳이 없다. 마날리도 비슷하게 북쪽에 있지만 맥간과 다른 갈래길이라서 마날리까지 갔다가 맥간을 가는 사람도 잘 없다. 아무리 장기 여행자라도 길에서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싶지는 않으니 보통은 맥간보다 더 유명한 마날리를 선택하고 북인도를 여행했다고 말하지. 쉽사리 맥간을 선택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맥간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와, 여기까지 왔다고?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알게 모르게 지지해주는 것 같다. 물론 이 모든건 내가 겪은 감각이라 사실과 전혀 무관할 수 있다.
맥간에서 익숙하고 든든한 마음이 드는 한편 여행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유독 외국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다 어디에서 자는거지? 거리를 걷다보면 서방에서 온 친구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눈 뜨면 찾는게 커피라서 그럴까. 커피에 진심인 카페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여태까지 인도에서 카페는 레스토랑과 같은 개념이라 커리와 같은 밥과 커피를 파는게 당연했다. 나는 카페를 커피 맛뿐만아니라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라 커피와 어울리지 않는 향신료 가득한 밥 냄새를 함께 맡는게 너무 싫었다. 여태까지 나에게 카페는 올드 마날리에서 만난 몇개 말고는 없었다. 맥간이라는 마을에 있는 카페 대부분은 우선 에스프레소 머신을 갖고있고, 사용하는 원두 패키징을 계산대 전면에 앞세워 원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줬다. 메뉴판을 보면 커리와 커피가 같은 ㅋ의 카테고리에 없었다. 커피와 간단한 샌드위치 및 쿠키가 전부였다. 아, 드디어 같은 세상에 온건가. 드디어 향신료와 커피가 아닌 구수한 빵과 커피 냄새의 공간에 들어온건가. 외국인들이 많이 보이는 카페는 우드계열의 인테리어와 주황 조명이 있었다. 심플하면서도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뒀다. 밥먹고 우다다 나가는게 아니라 혼자 생각정리도 좀 하고, 대화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이였다. 내가 원하는 카페의 쓰임새였다. 인도에 온지 한달이 지나서야 카페에 믿음이 생겨 라떼를 시켰다. 뭐야. 라떼아트를 처음 만났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던 샘도 이 마을에서는 라떼를 달고 살았다. 스팀이 반질반질하게 잘 쳐진 우유와 조화롭게 어울리는 커피는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맛이였다. 아트도 하트부터 로제타, 토토로같은 귀여운 동물까지 만날 수 있었다. 새롭게 여행 버튼을 누른 기분이랄까.
맥간에서는 많은 외국 관광객이라는 요인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들이 선호하는 카페나 공간에 대한 공급도 보이는 것 같았다. 마날리에서 고이고이 접어두었던 그 마음을 다시 조심히 펼쳐서 예쁘게 다리고 싶어졌다. 아니 잘 생각해봐. 한국에서 당연한 우드계열에 편안하고 깔끔한 스타일로 인테리어만 해도 여기서는 잘 될 것 같은데. 여기에 맥간 분위기에 맞춰서 환경적인 요소를 넣어 운영하면 진짜 잘 될텐데... 진짜 해봐? 내 머릿속은 또 팽팽 돌아갔다. 제대로 된 계산기를 두드리고 싶어 샘을 통해 호스텔 주인장에게 월 임대료를 물어봤다. 관광객이 많은 리시케시나 마날리에서 카페와 숙박업을 하고싶은데 여기는 시세가 어떤지 궁금하다며 물어봤더니 주인장은 금액과 함께 지역마다 다를거라며 잘 알아봐야 한다고 여러 조언을 줬다. 나는 고정지출과 대략적인 메뉴금액을 따져봤다. 한국기준으로 계산했을때 고정지출은 낮은 편이였으나 여기서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까지 고려하면 매출을 +로 쉽게 넘길 수 있는 숫자는 아니였다. 나는 또 한번 끄적이다 다시 고이 접었다. 리시케시까지 가게되면 그 때 생각해야지.
맥간에서는 일상같은 하루를 자주 보냈다. 부엌이 있고 집같은 편안함이 공존해서인지 요리를 자주 해먹었다. 간단하게 아점을 해먹고나서 로비에 앉아 책을 읽거나 영상 편집을 했다. 그러다 지겨울 때는 슬슬 밖으로 나가 시내한번 갔다가 습관처럼 양손가득 장을 봐오곤했다. 출출해지는 저녁에는 피곤하지 않을때는 요리를 해먹고, 피곤할 때는 나가 밥을 먹었다. 여긴 다른 곳과 다르게 팔라펠, 후무스 같은 중동음식도 많이 있었다. ‘역시 외국인들이 많은 곳에는 내가 즐길것도 많고, 할 수 있는것도 많겠군. 다양성을 부여하기 너무 좋잖아? 만약에 내가 여기 지내면~’ 이렇게 행복회로를 쌩쌩 돌려대 빠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쿠슘집에서 간만에 따듯한 가족의 정을 느끼고, 맥간에서 안온한 일상을 보내면서 다시 오래 살고 싶어졌다. 리시케시로 넘어가면 좋은 집을 찾아 2주정도 오래 머무르기로 다짐하며 다시 짐을 쌌다.
리시케시로 가는 길은 참 멀었다. 맥간으로 이동할때 새벽 6시에 나와서 저녁 7시가 넘어서야 짐을 풀고 근처 식당으로 갔다. 리시케시 이동은 그보다 더했다. 만디에서 맥간으로 이동할 때 구글맵기준 차로 5시간이니까 인도 프리미엄으로 10시간이면 충분하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였다. 맥간에서 리시케시는 구글맵 기준 10시간이였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흐르는 시간으로 따지면 반나절이 넘게 걸린다. 야간버스를 타자고 샘에게 이야기했지만 샘은 안전하지 않고 더 피곤하다며 매번 거절했다. 샘에게는 지켜야할 짐만 3개..아니 나 포함하면 4개다. 주간 이동할 때도 나는 버스를 마치 움직이는 시몬스처럼 잘 잤지만, 샘은 그런 나와 짐을 지켜내느라 잠든적이 많이 없었다. 그런 모습이 미안해서 “내가 지켜줄게. 걱정말고 한숨자!” 호기롭게 외쳤다가도 결국 시몬스행으로 가버리는 나였다. 샘에게 믿을 구석은 본인 자신뿐이였을게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침 일찍 맥간을 떠났다. 호스텔에서 히피 주인장과 서로의 사업을 응원하며 진한 포옹으로 헤어졌다. 매번 맥간 몰로드(시내)까지 걸어다녔지만 오늘은 긴 이동인데다 짐도 많아 릭샤를 잡았다. 몰로드에서 다람살라 정류장까지 지프차를 탔다. 1인당 20루피 정도로 처음에 도착했을 때 택시비의 1/30이였다. 600원 내면 갈 수 있는걸 10,000원을 내고 갔다니 허허. 괜찮아. 그땐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계획없이 다니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근데 인도에서 계획을 세운다고 될 일이 있을까? 스트레스만 더 받을 것 같아서 이렇게 돈 쓰는게 낫겠다 싶었다. 다람살라 버스 정류장까지 한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나는 분명 잠시 눈만 감았을 뿐인데 비몽사몽으로 내렸다. 여기서 찬디가르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를 타고 가려고 했는데, 금방 버스가 떠났다고 했다. 다음 버스는 2시간 뒤에 올거라 이번에도 여기저기 들리더라도 바로 이동하는 방향으로 정했다. 한시간 정도 걸려 캉그리라는 마을에 도착했고, 또 다른 버스로 갈아탔다. 아직 갈길은 구만리인데 환승만 4번째였다. 그런식으로 이동만 했을뿐인데 저녁이 찾아왔다. 목적지의 반틈 지점인 찬디가르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밤이였다. 북인도를 벗어나면서 온도가 높아져 겨울 외투를 다 벗었다. 맥간이 북인도 마지막 여행지라 나의 북쪽 여행을 추억하려고 했는데 끝나지않는 버스여행에 모든 감성이 말라붙었다. 찬디가르에 내리기 전에 샘은 나에게 여러번 신신당부했다.
“찬디가르는 큰 도시라서 사람이 많아. 그 말은 뭔지알지? 히얼 이즈 인디아. 이상한 사람도 많을 수 있다는거야. 소매치기도 많으니까 진짜 조심해야 돼.”
생각해보니 어제 샘이 엄마랑 통화할 때 찬디가르간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조심하라는 얘기를 백만번 했던 것 같다. 사라한에서 쏨과 비백이 델리에 가면 다 죽은 목숨아니냐고 취급한 것 처럼, 예전에 우리도 서울가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걸로 알았으니까, 샘의 엄마도 찬디가르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한다며 여러번 이야기했다. 어제는 샘에게 엄마가 있었고, 오늘은 샘이 나의 엄마였다.
찬디가르에 다와가니 도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넓은 도로에 쌩쌩 달리는 차들을 보며 질서가 느껴졌다. 도로가 너무 깨끗하게 정비되어있고 모든 설비가 갖춰진 곳이랄까. 조경에도 신경을 쓰는지 길거리에 쓰레기도 없고 나무나 풀이 규칙에 따라 정갈하게 심겨져있었다. 여태까지 봐왔던 인도와 너무 달라서 샘에게 찬디가르는 아주 큰 도시냐고 물어봤다. 샘은 찬디가르가 유명한 건축가가 계획해서 만든 도시라며 큰 곳이라고 말해줬다. 마무리는 유 노 왓, 히얼 이즈 인디아. 비케어풀 오케이? 였지만. 이런 인도는 처음이라 구글맵에 찬디가르를 쳐보았더니 지도상에서 사각형으로 무 자르듯 구역이 나뉘어져있는걸 보았다. 인도에도 계획 도시가 있다는게 신기하면서도 한국처럼 보이는 이 곳이 재미없게 느껴졌다. 인도 같지않고, 여느 흔한 외국나라 중 하나 같았다. 물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인도를 느낄 수 있었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대도시. 델리같았다. 내리자마자 많은 호객꾼들이 달라붙었다. 어딜 가냐, 어디로 가고싶냐. 샘이 현지인임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붙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여긴 외국인이고 내국인이고 관광객이면 다 타겟이 되는구나 싶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였다. 리시케시로 가기. 맥간에서 찬디가르까지 온거면 반은 왔다. 하루를 거의 다 쓰긴 했지만 이제 남은 반만 가면 된다. 버스를 알아보는데 리시케시라고 적혀있는 게이트가 없다. 벤치에서 나는 짐을 지키고, 샘은 다른곳에 알아보러 갔다. 돌아온 샘은 버스 오는걸 기다리자고 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 들어오는 통로쪽에 사람들이 한 두명 모이더니 순식간에 10명이 넘었다. 벌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스무명은 훨씬 넘어보였다. 누군가 한명이 한 손을 하늘로 들어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같이 흥분하고 격양되어 보였다.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어서 샘에게 물어보니 어떤 사람이 소매치기를 성공한 것 같다고 했다. 더 이해가 안됐다. 소매치기를 성공했으면 조용히 자축하고 돈 써야하는거 아닌가? 왜 저렇게 동네방네 소문내는거지? 혼란을 받아들일 수 없어 샘에게 질문 폭격했다. 아니, 훔쳤는데 왜 저렇게 모두에게 알리는거야? 그럼 당연히 들키는거아니야? 뭘 그렇게 잘했다고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처럼 왜 저래? 샘은 한마디로 대답했다.
“윤, 히얼 이즈 인디아.”
샘은 자기도 저 사람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정 궁금하면 가서 물어볼까?” 라며 농담을 건네는 동안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 무리 때문에 버스가 들어올 수 없어 계속 빵빵이며 직진했고, 이러다 사람들 다 쓸어버리겠는데 걱정되고, 무리 중 어떤 사람들은 서로 발길질을 하며 싸우고, 화난 개가 어떤 사람을 쫓고, 그 개를 잡으려 다른 사람들이 해꼬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총체적 난국이였다. 그러다 갑자기 경찰같은 존재가 나타나 용의자로 보이는 사람을 끌고가고, 용의자로 보이는 사람은 자기 몸에 손대지말라며 격하게 항의했다. 힌디어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욕을 하고 있는게 느껴졌고, 억울하다는 눈빛이였다. 대혼란과 폭동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남의 집 불구경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 세상에서 정신 못차리고 얼떨떨한 사람은 나뿐이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않았고 공포심에 사로잡힌 나는 짐을 더 가까이 붙여 모두를 경계했다.
샘은 이대로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알아보러 떠났다. 버스 회사로 보이는 사무실에 들어가 물어보다 우리를 찬디가르에 내려줬던 버스 직원을 만났다. 그는 여기에서 리시케시 가는 버스를 탈 수 없다고 했다. 샘은 다른 사람들 몇명에게 더 물어 그게 확실하다는 걸 알게 됐고, 우리는 찬디가르의 여러 정사각형 중 다른 박스로 넘어가야했다.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은 나는 식욕으로 해소하려고 했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에 호스텔에서 밥먹은게 전부였고, 이동하다보면 또 밤이니까 든든히 먹어야해. 대도시니까 근처에 분명 KFC가 있을거야. 탄두리 치킨 말고 빵가루 득실득실 살이 엄청나게 찔 것 같은 익숙한 한국식 치킨이 먹고싶었다. 구글맵에 KFC를 검색하니 과연 대도시였다. 정류장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피자헛, kfc, 맥도날드 등 다양한 프랜차이즈가 있었다. 나는 샘에게 어차피 대도시면 버스 계속 올텐데 KFC가서 치킨 먹고 생각하자고 꼬셨고 그는 와이낫, 코이띠까네이로 대답했다. 릭샤를 타고 KFC를 가서 주문했다. 온종일 굶고 돈도 안썼으니까 라는 합리화를 갖다붙여 시켰더니 콜라가 3개가 나왔다. 3인분 양을 시켰다는건 그때 알았다. 익숙한 닭다리를 뜯으며 잘 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훗날 사기 당할지도 모른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