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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정 Sep 29. 2022

모성애 스펙트럼

펼치자 모성애 스펙트럼


“내가 고래였다면, 엄마도 날 안 버렸을까?”

  화제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인 자폐인 변호사 우영우(박은빈 분)가 5년 만에 자수한 탈북자의 범죄사건을 진행하며 동료 변호사 최수연(하윤경 분)에게 건넨 말이다. 빌려준 돈을 받으려다가 폭행사건에 휘말려 가해자가 된 탈북자 계향심은 두 살 된 딸이 엄마를 기억할 때까지 기르기 위해서 5년간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자수를 한다. 수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울린 위대한 모성애이다. 이 사건을 맡은 변호사 우영우는 자신을 버린 엄마를 떠올리며 말한다. “고래사냥 법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새끼부터 죽이기야. 연약한 새끼에게 작살을 던져 새끼가 고통스러워하며 주위를 맴돌면 어미는 절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대. 아파하는 새끼를 버리지 못하는 거야. 그때 최종 표적인 어미를 향해 두 번째 작살을 던지는 거지. 고래들은 지능이 높아. 새끼를 버리지 않으면 자기도 죽는다는 걸 알았을 거야. 그래도 끝까지 버리지 않아.” 죽음을 무릅쓰고 자식 곁을 지키는 모성애는 분명 위대하지만 과연 오늘날에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도리스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떠올렸다.


위대한 모성애는 과연 정말로 위대한가

  『다섯째 아이』는 전통적 의미의 ‘정상 가족과 모성’에 대한 신념이 한 가정과 개인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과정을 섬뜩하리만큼 실감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혼란했던 시대에 바른생활과 신념을 지켜온 두 남녀(데이빗-해리엇)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아 행복한 대가족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데이빗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과 해리엇 부모님의 양육 도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춘듯해 보인다. 그런데 다섯째 아이로 폭력성이 짙고 다운증후군과 같은 장애(정확한 진단명은 알 수 없음)를 가진 ‘벤'을 낳게 되면서 그동안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벤이 가정에 불화를 일으키고 사회에서도 적응하지 못하자 남편 데이빗는 벤을 요양소로 보내버린다. 요양소의 참혹한 현장을 보게 된 해리엇은 자신이 감당하겠다며 벤을 집으로 데려온다. 결국 자식들은 폭력적인 벤과 함께 못살겠다며 집을 떠나고, 늘어난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여러 가지 일을 하느라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 않던 남편마저도 벤 하나 때문에 가정 전체를 등진 해리엇을 이해할 수 없다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결국 부부와 다섯 명의 자식들, 함께 지내던 친정엄마까지 복작이던 대저택에 해리엇 혼자 남겨진다.


“이건 정말 희한해요. 이전에, 아무도 그 어떤 사람도 나에게 ‘네 명의 정상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멋진 아이들을 갖다니 넌 정말 똑똑하구나! 그 애들은 모두 네 덕분이야. 훌륭한 일을 해냈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어요, 아무도 이제까지 그런 말을 안 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아요? 하지만 벤에 대해서는 전 그저 죄인이죠.”


  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의학 전문가 길리 박사마저도 벤의 선천적인 문제를 엄마의 부족한 사랑 탓으로 떠넘기는 순간 해리엇이 폭발하며 쏟아낸 말이다. 사회는 모성애의 당위를 추앙하지만 때로 그 무거운 책임감은 엄마의 삶을 숨 막히게 짓누른다. 해리엇은 ‘나는 불행을 겪었지 죄를 지은 것이 아니야'라고 외치지만, 선생님, 의사, 전문가, 이웃들은 엄마의 부족한 모성 탓이라며 외면한다. 외롭게 벤 옆에서 무너져내리는 해리엇을 보는 것이 슬펐다. 모성애가 개인의 삶을 이토록 잔인하게 파괴한다면 과연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모성애란 무엇일까

  해리엇이 벤을 요양소에서 데려온 것이 모성애 때문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벤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학습된 모성애를 저버린 엄마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 한 선택 같아 보였다. 만일 벤을 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사랑했다면, 벤이 다른 형제들에게 해를 끼칠까 걱정했던 만큼 그들이 벤을 고립시키는 문제도 함께 고민했어야 한다. 벤이 동네에서 갱단과 어울리며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다. 벤을 데려와서 방치한 것은 요양원에서 타인에 의해 삶을 망치느냐 아니면 나쁜 환경에서 스스로 삶을 망치느냐의 차이일 뿐 벤을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가출한 벤을 뉴스에서 폭동으로 만나게 될 날이 곧 오리라 생각하는 해리엇의 독백으로 끝난다. 헤리엇의 몸은 벤의 옆에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벤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소설은 벤의 질환만 조명하지만, 아이를 낳고 키워본 나에게는 해리엇의 아픔도 보였다. 출산 전후에 거의 대부분의 산모가 겪게 되는 우울증,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육아와 집안일을 하며 점점 망가졌을 몸, 친정엄마에게 육아를 의탁하며 느끼는 부채감, 데이빗와의 갈등에서 오는 외로움과 어디에 쏟아야 할지 알 수 없는 분노.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5명의 아이를 낳은 해리엇은 아마도 이 모든 질환을 어느 정도 겪었을 것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은 돌보지 못한 채, 사회문화적으로 학습된 ‘정상성’에 사로잡혀 결국 가장 중요한 나를 잃어버렸다. 모성이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발현되겠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길에 들어서고 결국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님은 분명하다.


모성애와 죄책감이란 반죽

  아이를 낳는다고 다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모순적인 현실과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떠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 길을 찾는 과정 그 자체이다. 작년 가을 출산을 하고 1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두 가지 감정도 감사함과 죄책감이다. 일단 큰 수술 없이 무탈하게 출산한 것이 감사했다.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 선택할 수 없듯이 아이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를 우리는 선택할 수 없다'라고 길리 박사가 말한 것처럼 순산은 운이 따른 덕분이다. 실제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산모와 아이에게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알 수 없다. 이제는 언제나 행운만을 바라는 것이 너무 순진한 욕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 생명을 얻는 일은 틀림없이 귀한 일이지만, 탄생의 기쁨 뒤에 가려진 산모들의 고통과 희생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어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지, 특히나 아픈 아이를 낳은 엄마의 삶이 얼마나 큰 고통에 잠기는지를 보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죄책감은 의식적으로 거부하려 노력해도 불현듯 찾아온다. 신생아 때는 아이가 울 때 달래지지 않으면 내가 무언가 잘 못해준 것 같아서 미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육아에 점차 익숙해졌지만, 복직이 가까워질수록 ‘생후 3년 엄마와의 애착이 아이의 평생을 좌우한다'와 같은 지침 앞에 서면 작아졌다. 복직을 하면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언제나 ‘죄송하다'라는 말을 달고 다닐 것 같은 나의 미래가 그려진다. 만일 아이가 자라면서 아프거나, 어린이집 생활에 적응을 못하면 나의 죄책감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 뻔하다. 왜 모성애와 죄책감은 늘 같이 오는 걸까. 마치 한데 엉겨 붙은 반죽 같아서 따로 떼어놓기가 어렵다. 한편 생각할수록 무언가 분하다. 육아는 부모 공동의 몫인데, 왜 사회는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성애'를 운운하며 책임을 한쪽에게 떠넘기는지. 벤의 문제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해리엇을 죄인 취급하고, 헤리엇은 남편처럼 도망가지도 못하고 모두가 떠난 집에 홀로 남아 처절하게 무너지는 것일까.


펼치자, 모성애 스펙트럼

  “자폐의 공식적인 진단명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입니다. 스펙트럼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자폐인은 천차만별입니다.” 우영우 변호사도 자폐가 있으니 자폐가 있는 의뢰인의 사건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며 일을 맡기는 선배 정명석(강기영 분) 변호사 에게 우영우는 이렇게 답한다. 자폐의 범주는 스펙트럼처럼 넓어서 자폐인이 자폐인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다. 이제 모성애도 과거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한 고정관념을 깨고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 죽은 새끼의 주변을 맴돌다가 같이 죽게 되는 엄마 고래처럼 무조건적으로 희생을 감수하는 것만이 모성애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본질 아래 모성의 모습은 저마다 고유한 삶에서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고유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이다. 아이뿐만 아니라 부모도 고유한 존재이다.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진 인연 사이에 사랑이라는 단단한 토양이 있다면 삶의 여러 모순과 역경을 만나더라도 자신만의 굴곡진 나이테를 만들며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로 성장할 것이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서 만든 우리의 삶이 결국 모성애가 무엇인지 말해주리라. 


  이제 막 엄마가 된 지 1년이 되어가는 나부터 모성애 스펙트럼을 펼쳐 보려 한다. 일단 의무와 소망을 잘 분별해야겠다. 내가 해야 하는 것(Must)과 원하는 것(Want)과 아이에게 필요한 것(Need)은 다를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의무는 언제나 사랑임을 잊지 않고, 나의 소망이라는 욕심에 눈이 멀어 희생과 포기라는 핑계를 대며 자책하고 불평하는 어리석은 일은 경계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행복하고 감사함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서 그 에너지를 아이가 인생을 주체적으로 그려나갈 수 있도록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데 쓰고 싶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평화가 유지되는 가정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서로에게 건강하게 의지하고 또 자립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방식으로 아이에게도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가정에 불운이 닥칠 때면, 고통 속에서 자책하며 도망치기보다는 우리 앞에 놓인 생을 나름대로 쓰임 있게 살아내겠다고 다짐해본다. 내가 그리고 나의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세상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존중받길 원하는 것처럼 나도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바라 볼 일이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게는 열광하면서 ‘이상한 아이 벤'은 배척하고, 엄마가 버린 우영우를 키운 아버지 우광우(전배수 분)에게는 찬사를 보내면서 벤을 낳은 해리엇에게는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사회에서는 우영우와 벤의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도 모두 수 없다. 행복한 가정과 모성애의 정의에 대한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은 이 간극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행복한 가정이란 무엇인가. 모성애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고민할 시간이다.


우리는 모두 이미 각자의 답을 가지고 있다.





유인식 연출, 문지원 극본/2022/ENA


도리스 레싱/민음사/1999/191p




*이 글은 2022년 제 11회 협성독서왕 독후감 공모에서 [입선]에 당선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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