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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정 Apr 12. 2022

승진에서 밀리고 싶지 않지만 아이도 잘 키우고 싶어

나부터 이중 구속에 빠지지 말아야지

  승진 발표가 났다. 두각을 나타내 발탁 승진한 사람도 있었고, 이미  몇 차례 누락해서 이번에는 승진할 줄 알았는데 명단에서 끝내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나도 올해가 책임 진급 대상인 해이기 때문이다.


 메타 플랫폼스(구 페이스북) 최고 운영책임자(COO)를 지내고, 월트 디즈니, 스타벅스 등에서 이사를 역임한 셰릴 샌드버그는 『린인』에서 ‘하이디와 하워드 연구(컬럼비아경영대학원, 2003)’를 소개한다. A/B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성공한 사업가의 평판을 조사하면서 A그룹에는 그 사람이 ‘하워드(남성 이름)’라고 소개했고, B그룹에는 이름만 바꾸어 ‘하이디(여성 이름)’라고 소개했다. 두 그룹 모두 하워드와 하이디가 유능하다고 평가했지만, 하워드는 ‘인간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평가한 반면 하이디는 ‘이기적이고 함께 일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은 아님'이라고 답했다. 남성은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고, 여성은 친절하고 희생적이라는 고정관념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이에 반하는 여성은 유능하더라도 ‘성격이 안 좋다'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동시에 생기는 것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나아졌을까? 승진을 하려면 유능해야 하는데, 냉정하게 일하는 여성에게는 ‘성격이 안 좋다’는 꼬리표가 붙고, 가정보다 일에 집중하는 여성은 ‘독하다’ 혹은 조금 다른 의미의 ‘대단하다'라는 식의 좋지 않은 평가가 따라온다. 심지어 육아를 하면서 일도 최선을 다해 하고 싶은 여성 스스로가 ‘나는 나쁜 엄마인 걸까'라는 자기 검열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유능함과 적당히 거리를 두게 되는 ‘이중 구속'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여성은 이러한 이중 속박을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에 기회에 더 달려들어야 한다(Lean in)’고 셰릴 샌드버그는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영향력 있는 고위직에 여성이 절반(50%) 가량 된다면 강한 여성, 무뚝뚝한 여성, 유머러스한 여성 등 다양한 캐릭터가 생길테니 여성을 일반화해서 섣불리 재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셰릴 샌드버그는 이를 ‘임계점'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여성 관리자가 절반 이상으로 늘어나자 여성리더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과 불평이 잦아드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이 임계점을 넘기기 위해서는 오래 일 하는 여성이 더 많아져야 하는데, 가장 큰 고비가 바로 ‘육아'다. 육아 휴직으로 여성은 커리어에서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책에서는  이를 ‘엄마 벌점(mother penalty)’이라고 소개한다. 승진 누락, 급여 삭감, 조기퇴직과 같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육아를 남편과 함께 하면 낫지 않겠냐고? 육아로 인한 복지가 경력에 페널티로 작용하는 것은 남녀 모두 마찬가지인데, 특히 남성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적용된다. 육아휴직을 쓰는 남성, 이른바 ‘육아대디’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수라 남성은 훨씬 더 부정적인 사회적 압력과 싸워야 한다.


  “경력을 길고 가혹하지만 끝에 가서는 노력에 대해 보상받는 마라톤이라고 생각해보자.
마라톤을 하기 위해 똑같이 체력을 키우고 훈련을 해온 남녀가 출발선에 선다.
출발 신호가 터지자 남녀가 나란히 달리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남성 마라토너는 '힘내! 자기 페이스를 유지해!'라는 응원을 듣는다.
하지만 여성 마라토너는 '이렇게까지 달릴 필요는 없잖아!'
아니면 '출발은 좋았어, 하지만 끝까지 달리고 싶지는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달릴수록 '계속해, 거의 다 왔어'처럼 남성을 응원하는 함성은 더욱 커지지만
여성 마라토너의 귀에는 자신이 기울이는 노력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자기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계속 달리려는 결심을 흔들어낸다.
심지어 안팎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적의가 담기기 시작한다.
여성이 가혹한 경주를 견뎌내려고 버둥거릴수록
구경꾼들은 '아이들이 집에서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데 어째서 지금 여기서 뛰고 있는 거지?'라고 소리친다.
만약 여성 마라토너가 군중의 아우성을 무시하고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면
자기 컨디션을 찾고 제대로 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일반적으로 남성은 더욱 막중한 책임감으로 일에 집중하는 반면, 여성은 ‘엄마 벌점'을 받고, 둘 다 온전하게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경력을 희생하고 가정에 충실하는 것이 더 나은 셈이 되는 선택지를 놓고 고민한다. 내가 1년 3개월의 긴 휴직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육아가 적성에 맞더라도 절대 회사 그만두지 말고 꼭 복직해'라고 신신당부했던 여자 선배들 생각이 났다. 동시에 몇년 치 급여를 한번에 주는 희망퇴직이 뜨자 고민 없이 바로 퇴직을 선택했던 여자 선배들도 생각이 났다. ‘이래서 여자들은 키워봤자 소용이 없어'라는 군중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이런 고민을 미리 했던 셰릴 샌드버그는 조언한다. 군중의 아우성 따위는 사뿐히 즈려밟고 내 페이스대로 완주하라고. 육아휴직으로 인해 나도 다음 승진은 기약할 수 없게 되었고,  복직 후에는 경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거다. 벌써부터 안팎에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내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어본다. 경력은 길고 긴 마라톤이니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제 중년의 나이에도 조직생활을 하는 여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고된 길을 한 걸음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선배들의 뒷모습이 그 어떤 조언보다도 큰 용기가 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여성이 오래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말과 글, 그리고 네트워킹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다혜 기자는 『출근길의 주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누구 한 사람만 앞에 있어도, 한 명만 눈에 보여도, 그 길을 선택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계속해주세요. 거기에 길을 만들어주세요. 시야 안에 머물러주세요.” 언젠가 이 긴 마라톤이 끝나는 곳에서 더 많은 여성들과 기쁨과 축하를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셰릴 샌드버그 (지은이) 안기순 (옮긴이) / 와이즈베리 / 원제 : Lean in (2013년)



이다혜 / 한겨레출판사 / 2019 / 288p


* 이 글은 2022년 5월 8일 #유어바이브(한국일보가 창간한 2535 MZ세대를 위한 뉴스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yourvibes.co.kr/?p=20849


*사진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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