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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근정 Oct 04. 2022

안녕이란 말 대신

나의 소중한 시절인연에게

육아를 하다 보면 인내심의 한계에 부딪히는 일이 많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게되는데, 화를 내고 상황을 마무리하면 안 된다. 아이들은 영화의 엔딩 장면처럼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을 기억하는 습성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직장생활도 엔딩이 중요하다. 퇴사 메일을 보내야 한다는 매뉴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메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이직과 퇴사 주기가 더 짧아져서 그런지 지난 7년의 직장생활 동안 나도 적지 않은 퇴사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읽는 그 순간만큼은 안 좋았던 기억도 추억으로 미화된다. 하지만 딱 그 정도. 기억은 금방 희미해진다. 회사에서 공식적인 계정이 사라지기 전날 숨은 참조를 통해 통보처럼 날아오는 전체 메일은 어딘가 아쉽다. 정작 퇴사 당사자는 연차 소진으로 부재한 상황이라 답장도 할 수 없다. 영혼 없는 인사말은 금방 휘발되고, 작위적이거나 위선적인 인사말은 좋은 엔딩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은 대부분 개인적인 메일이다.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고, 좋았던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메일은 고맙고 반갑다. 최근 받은 퇴사 메일이 그랬다. 유어바이브 매거진에 MZ워킹맘의 육아와 직장생활 에세이를 연재하는 동안 편집장님이 바뀌었다. 전 편집장님으로부터 ‘인사’라는 짧은 제목의 메일을 받았는데, ‘글의 인사이트가 좋았고, 워킹맘이라 더 공감이 되었다’라는 내용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로써 전 편집장님은 방구석 에세이스트의 길고 긴 투고 글을 정성스레 읽고 알아봐 준 사람으로 깊이 새겨졌다. 당연히 그 사람의 다음 행보를 응원하게 된다.


반면 안 쓰느니 못한 메일도 있다. 마치 남은 동료들로 하여금 가라앉는 잠수함에서 탈출하지 못한 무능한 사람처럼 느끼게 만드는 경우가 그렇다. ‘부족한 저에게 기회를 주신’이라고 쓰여있지만 ‘(잘난) 저는 제 길 찾아갑니다’라고 읽힌다. 평소 근무태도와는 다르게 위선적인 메일도 그렇다. 재직 중에 늘 불평을 늘어놓으며 이직 준비를 하더니 끝내 이뤄서 나가는 사람도 있다. 평소 태도가 좋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아무리 겸손한 표현으로 포장하려 해도 그 모습마저 오만하게 비치기도 한다. (물론 맡은 업무에 책임을 다하며 이직에도 성공하는 성실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나도 어느덧 경제활동을 한 지 10년이 되었다. 지금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 여러 번 이직을 했다. 외주제작사 프리랜스 아나운서, 방송국 계약직 기획자, 자동차 회사 연봉계약직 홍보의전사원. 간간이 했던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이 정도. 주욱 나열해보니 다양한 일터에서 다양한 고용형태를 경험해본 듯하다. 그런데 제대로 된 퇴사 메일을 써본 기억이 없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매번 다음 일자리를 찾느라 도망치듯 퇴사를 했기 때문이다. 경험이 부족했던 그 시절의 나는 퇴직 의사를 밝히는 일 자체도 어려웠다. 퇴사 메일을 쓰거나 마지막 인사를 나눌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나쳐버렸지만 여전히 나에게 소중한 시절인연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김연수 소설가가 십년간 써온 일기를 모은 산문집 『시절일기』의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쓴 글, 저절로 쓰여진 글’ 작가는 어떤 글이든 한 편도 쉽게 쓰여지는 일이 없었지만 이미 쓰여진 글에 성찰, 침묵, 질문이 쌓여서 어느 순간 저절로 써지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퇴사 메일 역시 동료라는 이름으로 한 시절을 함께 지나온 시절인연에게 마지막으로 보내는 글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메일은 당사자가 직접 쓴 글이지만, 그 의미는 지나온 시간이 말해줄 테니 세월이 쌓여 저절로 쓰여진 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퇴사 메일을 쓰느냐 마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퇴사할 때 메일을 쓰지 않아도 이따금씩 회자되고 동료들이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주 예의 바르게 메일을 썼지만 욕을 먹는 사람도 있다. 사실은 함께 지나온 시간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나는 어떤 퇴사 메일을 쓰게 될까 생각해본다. 미리 생각해 놓고 싶은데, 이건 아마도 나의 가까운 동료들과 오늘을 진실하게 보내다보면 알게 되겠지.


 김연수 / 레제 / 2019 / 336P 


* 이 글은 2022년 10월 2일 한국일보 <유어바이브>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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