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스러운 엄마의 백화점 나들이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 프로젝트는 장혜영 의원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기획한 캠페인으로 한 때는 썼지만 이제는 윤리적인 이유로 더는 쓰지 않는 단어나 표현을 모은 작업이다.
“유아차(乳兒車) 대여소 몇 층에 있어?”
아기와 함께 처음으로 백화점을 가기로 한 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뭐 유별나게 유아차라고 하나. 여기 유모차(乳母車) 대여소 1층에 있네"라고 대답하며 ‘유모차 대여소'라고 크게 적힌 팻말이 걸린 현장 사진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그날 이후 계속 생각했다. ‘정말 내가 유별난 걸까.' 우리 부부는 '평등육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엄마(母)만 포함된 이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2018년부터 정부가 성차별 표현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유모차'를 성중립 표현 ‘유아차'로 바꾸어 쓸 것을 권고해오고 있지만, 아직도 현실에는 ‘유모차’만이 존재하며, 이를 문제삼으면 유별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굳이 유별난 사람이 되면서까지 이 추상적인 단어를 써야할까. 힘들게 물살에 맞서지 말고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면 나도 좀 더 편하지 않을까.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며칠간 고민 끝에, 나는 유별난 엄마가 되기로 했다. 롯데백화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고객의 소리에 제안하는 내용의 글을 썼다.
“안녕하세요, 올해 초 롯데백화점 동탄점에서 '유아차'를 구매한 박근정이라고합니다. 앞으로도 롯대백화점 동탄점을 자주 이용하게 될 사람으로서 롯데백화점을 위해 제안드리고자 이렇게 메일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올해 초 롯데백화점에서 '유아차'를 구매하기 전까지 백화점에서 서비스로 제공해주는 '유아차 대여'를 자주 이용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모차 대여'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아쉬웠습니다. 2018년 서울시에서 공표한 '성평등 언어사전'에 따르면 '유모차’(乳母車)는 육아 책임을 여성(母)에게만 지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므로 유아가 중심이 되는 표현 ‘유아차’(乳兒車)로 바꾸어 쓰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동탄 롯데백화점은 가장 최근에 오픈하면서 갤러리와 스토어를 접목한 신개념 콘셉트의 공간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만큼 시대감성에 있어서도 뒤쳐지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다면 롯데백화점의 위상을 높이고, 주고객층인 3040 여성뿐만 아니라 잠재고객인 2010 여성들까지도 충성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중립 언어를 적용하는 선진적인 지점이 '롯데백화점 동탄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검토해보시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놀랍게도 한 시간 만에 답변이 달렸다.
“박근정 고객님 안녕하세요? 롯데백화점 동탄점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모차 대여소 명칭 변경에 대해 제안해 주신 고객님의 소중한 의견은 당점 점장 내용 공유하였으며, 주말을 보내고 본사 유관 부서에도 내용 전달하여 반영될 수 있도록 검토 요청하겠습니다. 추후 진행되는 사항은 고객님께 피드백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소수의 참여가 현실을 바꾼다는 말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견한 경제학자 나심 스콜라스 탈레브는 현대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 진단한 책『스킨인더게임』에서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소수의 적극적인 참여가 현실의 통념을 바꾸는 사례를 여러가지 소개한다. 사례 하나, 0.3%의 코셔 혹은 할랄 식품 소비자를 위한 음료가 행사 전체의 기본 음료로 제공된다. 코셔 혹은 할랄 식품 소비자는 절대로 비코셔 혹은 비할랄 식품을 먹지 않는데, 일반인들은 코셔 식품도 먹기 때문이다. 사례 둘, 미국 항공사와 학교는 땅콩을 제공하지 않는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땅콩은 물론 땅콩이 묻은 조리 도구가 사용된 식품도 먹지 못하지만, 땅콩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들은 땅콩이 완전히 배제된 식품도 먹기 때문이다. 사례 셋, 자동차에 자동변속기가 기본셋팅이 된 것도 모든 운전자가 자동변속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수동변속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자동변속기도 사용하지만, 자동변속기만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수동변속기를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영어가 만국 공통어가 된 이유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길)모두 양보하지 않는 소수가 전체를 장악한 현상으로 수리물리학에서는 이를 ‘재규격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목소리는 영향력이 미미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소수가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현실에서 '행동'하는 사람들 일 때 사회 전체의 기준이 될 만큼 강력했다. 여기서 방점은 ‘참여', 바로 ‘행동’에 있다.
얼마 전,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양보할 수 없다며 출근길 지하철 시위로 ‘행동’에 나섰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격한 시위 방법을 두고 선량한 시민들의 불편을 볼모로 잡은 비문명적인 행위라는 조롱과 비판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라 보지 못했던, 보이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이 무엇인지 비로소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 나도 촌각을 다투며 출근하는 직장인이었던 터라, 출근길의 지하철 지연과 서행이 얼마나 속 끓는 일인지 잘 안다. 그런데 유아차를 밀고 외출해보니 완전히 다른 풍경이 보였다. 일단 주변 지하철역들 중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찾고, 엘리베이터가 있다면 몇 번 출구에 있는지 살피고, 유아차를 끌고 들어갈 수 있는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하면서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문제는 비단 장애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혼자 힘으로 이동이 불편한 노약자나 어린이, 임산부, 짐이 많거나 유모차를 끌고 외출하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이동권이란 단순히 일터나 약속에 늦는 문제가 아니라 일터를 갖지 못하고, 더 나은 미래를 약속을 할 수 없는 삶이 되어버리는 생존문제였다. 이러한 사실을 육아를 시작하며 두손과 발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 되고나서야 공감하게 되었다. 과격한 시위로 이슈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과연 ‘차별금지법’이 왜 십수 년째 제자리걸음인지, 무엇에 대한 합의가 어려운지 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보고 반성했다.
‘누구나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라고 경고하는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김지혜 작가는 “차별은 무수히 많은 이유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복잡한 현상이기때문에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라고 방어하기보다는 나도 어딘가에서는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자각하고 부족한 나를 성찰하며 평등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 과정이 나는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헛된 믿음보다 훨씬 값지다.”라는 의견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정의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정치 철학가이자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도 대표 저서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상에서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으로 이루어지는 차별에 대해 무작정 사람들을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에 기여한 행동, 행위, 태도에 대해 사람들과 제도는 '습관적인 행동과 태도를 성찰하고 바꾸는 방법으로 책임'을 져야한다." ‘유모차’ 역시 의도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려는 말이 아니라, 오랜 시간 습관적으로 써 온 말일뿐이다. 하지만, 이미 여성이 육아의 책임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떠안고 있는 현실에서 지금의 습관과 태도를 성찰하지 않으면, 기존의 고정관념은 계속 강화되고 우리가 지향하는 ‘평등육아'는 더욱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나도 절판된 ‘유아차' 액세서리를 구하기 위해 중고사이트에 ‘유모차’ 관련 키워드 알람을 걸어놓았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먼저 쓰지 않으려고 한다. 유난스럽다는 핀잔을 듣더라도 “안녕하세요, ‘유아차' 레인커버 구매하고 싶습니다.” 라고 인사하며 나부터 오랜 습관을 바꿔보려 한다. 그밖에도 ‘폐경’은 ‘완경’으로 여자에게만 사회문제의 책임을 지우는 말 ‘저출산’은 ‘저출생’으로, 결혼은 당연히 해야한다는 가치관이 담긴 ‘미혼’은 ‘비혼’으로, 한 사람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큰 피해를 주는 중대한 범죄 ‘몰래카메라’, ‘리벤지 포르노’는 각각 ‘불법촬영’, ‘디지털 성범죄’로 정확하게 쓰도록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적극 권할 예정이다. 이왕이면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나 기관이 함께 써주면 더욱 좋겠다.
‘유아차 대여소’ 명칭 변경을 제안한 이후에 롯데백화점으로부터 '전국 지점에 적용해야 할 사안이라 검토에 시간이 걸린다'는 피드백을 마지막으로 받았다. 과연 롯데백화점이 프로유난러 고객의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수용하고 ‘재규격화'하겠다는 약속을 지킬 것인지 끝까지 지켜볼 일이다. 부디 별다른 진전 없이 시간만 끌다가, 어느 프로유난러 고객이 백화점 로비에서 소란을 피워서 다른 고객의 쇼핑에 불편을 주고, 영업을 방해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한편, 2007년 17대 국회에서 처음 발의되었던 ‘차별금지법'*은 발의, 계류, 폐기를 반복하며 2022년 지금까지도 여전히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차별금지법’에서는 23가지 차별의 기준을 명시한다 :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 국가, 출신 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성별 정체성, 성적 지향,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고용형태, 학력,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 이 글은 2022년 5월 22일 #유어바이브(한국일보가 창간한 2535 MZ세대를 위한 뉴스 매거진)에 게재되었습니다.
https://yourvibes.co.kr/?p=22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