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에서 마케터로
“연봉은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돈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25살, 프리랜스 아나운서로 일하던 가을 날이었다. 퇴사하는 내 자리의 후임 아나운서 채용을 위한 면접에 들어갔다. 유능한 지원자가 많았다. 실무 점수가 높았던 지원자에게 조심스레 희망연봉을 물었다. 국내 유수 대학과 대학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영어와 중국어까지 3개 국어 능통, 그밖에 무수한 자격증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이력서는 그가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인지 말해주고 있었기에 원하는 연봉 수준이 궁금했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을 들었다. '돈보다 소명의식이 더 중요하다'라는 대답이었다. 그때 느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수요보다 공급이 과도하게 많은 시장에서 참여자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 천 명 중에 한 두 명만이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현실에서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유능함과 성실함만으로는 부족했다. 적은 월급, 불안정한 고용 등의 악조건도 경력을 위해서라면 받아들여야 했다. 아나운서 공채 준비와 일반 취업 사이에서 갈등하던 마음이 일반 취업으로 기운 순간이었다. 아나운서의 일을 좋아했지만, 나에게 직업이란 먹고사는 일이기도 했다.
모든 취업이 다 어렵지만, 언론사는 지원할 수 있는 회사수 자체가 적어서 합격자도 소수다. 마치 이 과정이 고시처럼 통과하기 어렵다고 해서 ‘언론고시’라고 불린다. 기약 없이 도전하다가는 고시낭인이 되기 십상이라 딱 2년만 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준비를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준비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외주제작사에 입사해서 프리랜스 아나운서로 국세청, 법무부 등 관공서의 교육 방송과 서울시의 여러 구청의 방송을 진행했다. 일 하는 중에 기회가 닿아 EBS 교육방송국에서 사회공헌 캠페인 기획과 홍보 일도 해볼 수 있었다. 모두 계약직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조건이었다. 정작 내가 가고 싶었던 정규직 채용 조건의 언론사는 2년에 한 번씩 신입사원을 뽑았는데, 마침 언론사 총파업을 시작해서 몇 년간 신입사원 공개 채용이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막상 약속의 시간이 되자, 생각보다 미련이 남지 않았다. KBS 기상캐스터이자 사업가인 이세라 작가는 『미술관에서는 언제나 맨얼굴이 된다』에서 ‘꿈꾸는 삶보다 중요한 건 내 꿈에 내가 갇혀 질식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숨 막히게 간절했던 시간을 보낸 탓인지 꿈을 포기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뒤늦게 진로를 바꾸고 맞닥뜨린 취업시장도 살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반기 공채시즌에 스무 곳 넘게 지원했지만 결과는 모두 불합격, 심지어 1차 서류 전형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어느 회사도 불합격의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졸업대학(서울 중위권 대학), 전공(국문학), 나이(20대 후반) 그리고 성별(여자)과 같은 조건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이제 와서 바꿀 수도 없는 것들이라 나는 아예 취업 자체가 안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대기업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하기 시작했다. ‘공개채용’이라는 획일화된 방식에서 벗어나 ‘직무중심'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학교, 전공, 자격증, 인적사항 등을 보지 않고 오로지 ‘사업 기획안 제안 PT'만으로 신입사원을 선발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사 입사를 위해 해온 공부는 기업의 브랜딩, 홍보, 마케팅 직무의 사업기획안을 쓰는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 금융사의 브랜드전략팀에 입사했다. 시대가 변한 덕분에(?) 평범한 스펙과 기업이 선호하지 않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취업을 했다.
누군가에게 취업은 꿈을 이루는 일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오랜 꿈을 포기하는 일이었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여기서 그만두면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실패자라고 수군대지 않을까, 이제 와서 새로운 일을 다시 처음부터 준비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지금까지 쌓은 경력이 아까우니 딱 1년만 더 해 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행복하지가 않았다. 급여를 받지 않아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있는 특이한 업계에서 타인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동안 나는 생기를 잃어갔다.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 나오는 단편 「탐페레 공항」에는 다큐멘터리 피디를 꿈꾸었지만 방송국 입사에 연거푸 낙방하고, 일반 식품회사의 회계팀에 입사한 주인공이 나온다. 오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반 회사에 입사해 연봉계약서에 서명할 때, 쓸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던 주인공은 반대로 매우 기뻐한다. 계약서에 쓰인 4대보험, 상여금, 연차,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따뜻하고 폭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아나운서는 내가 오랜 시간 꿈꿔온 일이지만 경력 없는 프리랜서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불안했고, 나는 그러한 불확실함을 견디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을 겪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오히려 나는 규칙적인 일과와 시간이 흐르며 전문성이 길러지는 일상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조직에는 조직 나름의 논리가 있었지만 괜찮았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회사 밖에서 하면 되니까. 연차가 쌓일수록 오르는 연봉, 각종 수당과 상여금이라는 경제적 보상에 따르는 자유가 나에게는 중요했다. 물론 경제적 자유와 월급의 노예가 되는 것은 한 끗 차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리 걸리지 않았지만.
막상 취업을 해보니 기업의 브랜딩 직무는 아나운서를 준비할 때 공부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이미지'는 ‘비주얼 브랜딩'으로, ‘말과 글'은 ‘버벌 브랜딩'이라고 부를 뿐이었다. ‘브랜드 평판 제고 전략'이라는 주제로 PT를 했던 블라인드 역량면접 전형에서 1등으로 입사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언론고시를 준비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실패가 뜻밖의 기회로 연결되었다. 오랜 시간 달려온 길의 문이 닫히자 다른 문이 열리고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그 때는 알 지 못했다.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는 순간만큼 실패하고 좌절할 때에도 나의 세계가 넓어진다는 사실을. 길을 잃고 헤매던 순간에 찾아온 우연과 기회가, 뜻대로 되지 않았던 실패와 좌절이 켜켜이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제는 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거나 길을 잘못 들었을 때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계속 걷다 보면 이내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되리란 것을. 그 길의 끝에는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한 낯선 내가 기다리고 있을테니 후회없이 반갑게 맞아주라고 대한민국 최초로 필즈상을 수상한 수학자 허준이도 서울대 졸업식 축사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지루한 일상을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온전하게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