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Identify (with)

멀지 않다

by 바다의별

신원, 신분이 영어로 identity라면, 신원 및 신분을 확인하는 동사는 idenfity이다. 첩보 영화 같은 걸 보면 "Identify yourself!"라고 외치는 장면이 종종 있다. 네가 누군지 밝히라는 뜻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건조한 단어가 내게 조금 슬픈 느낌으로 다가온다. 인명 피해가 많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뉴스에서는 이 단어가 여러 차례 반복된다. 초반에는 늘 피해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몇 명이 사망했는지, 몇 명이 부상을 입었는지, 실종자는 없는지... idenfication (신원 확인)의 절차다.


대규모 재난이나 재해가 발생하면, 희생자들이나 주변 가족들의 사연 또한 함께 전해지기 마련이다. 그들 중에는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등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던 사람도 있고,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도 있고, 하필 그날 난생처음으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도 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이 그런 사고를 당할 거라고, 혹은 가까운 사람들이 그런 사고를 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 내가 당할 수도 있는 사고였다고, 또는 내가 아는 사람이 그 피해자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고 현장에 놓인 꽃다발을 보며, 발을 동동 굴리는 유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우리는 함께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기에, 희생자들의 절박함과 유가족들의 슬픔은 언제나 우리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그들의 입장에 이입해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다 보면, 나를 결국 그들과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I identified with the families of the victims.

(나는 희생자들의 가족과 나를 동일시했다.)


identify with는 누군가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물론 나는 그들이 아니기에, 나는 결코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나 역시 아무 손도 쓸 수 없었던 상황을 겪어보았기에,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죽음이 찾아오는 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에, 가족들이 오랫동안 연락이 닿지 않아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스치던 밤이 있었기에, 그들이 느꼈을 서늘함이 그리 낯설지 않다.


감정적, 심리적 측면으로 공감하는 건 empathize with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identify with은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 또한 공감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공감을 하다 보면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고, 나를 발견하면 그들의 입장이 조금 더 선명하게 와닿기 마련이니까.


empathize with를 넘어 identify with가 되는 순간, 타인의 이야기는 더 이상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 혼자 겪는 슬픔은 없다. 우리는 모두 그 순간을 함께 겪었을지 모르는, 그들의 또 다른 버전일지도 모르니.



비슷한 표현들

I felt for the families of the victims.

I could relate to the families of the victims.

I empathized with the families of the victims.

felt for는 안타까움을 느끼는 정도를, relate to는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보아서 이해하는 정도를 표현한다. empathize with는 감정적 이입을, identify with은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을 표현한다.

비 내린 베를린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