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캬비크에서 스톡홀름으로
침대에 누웠지만 휴대폰을 끌 수가 없었다. 내가 잠들기 전에 딱히 변화가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날씨 예보와 공항 상황을 확인했다.
평소 같으면 지연 정도는 받아들일 텐데, 이날은 쉽지 않았다. 레이캬비크로 올 때는 헬싱키만 경유하면 되었지만 귀국할 때는 2회 경유를 해야 했기에, 헬싱키 외에 신중하게 고른 곳이 스톡홀름이었다.
레이캬비크에서 스톡홀름까지는 3시간 소요되지만, 시차는 스웨덴이 2시간 앞선다. 아침 10시 30분 비행기를 타도 도착하면 오후 3시 40분.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시내에 도착하면 이미 5시 가까이 될 것이었기에, 어두워지기 전에 도시를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1시간 남짓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지연까지 된다면? 우리는 처음 가보는 스톡홀름에서 잠만 자고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기자기한 동네 사진에 마음이 끌렸고, 마침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스톡홀름 내 노벨박물관에도 관심이 생기던 차였다. 그런 곳을 잠시나마 둘러볼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밤새 비행기 고민으로 겨우 잠들었다가 (고민한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4시 반에 일어났다. 다행히도 몇몇 비행 편들 외에는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전날 평균 초속 30m이던 바람은, 이날 아침 20m 정도였다. 물론 초속 20m가 넘어도 비행 편이 취소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비행기를 탑승할 시간쯤이면 10m 안팎이 될 거라는 예보도 있었다. 믿어보기로 했다.
일주일 내내 투어 버스에 오르던 6번 픽업 정류장에 마지막으로 다시 섰다. 아침 6시였는데도 기다리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오전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이 원래 많은 건지, 전날 항공편들이 취소된 것 때문에 이날 탑승객이 많아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픽업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좀 더 큰 공항행 버스로 갈아탔다. 우리 버스가 늦게 도착했는지 이미 2대의 공항버스는 다 채워졌고, 세 번째 버스의 마지막 남은 빈자리에 겨우 앉았다. 짐을 싣는 일도, 좁은 자리에 비집고 앉는 일도, 어두운 새벽에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면 뭐 어떤가. 결국 공항에 무사히 도착했고, 비행기도 정시에 출발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라운지에 앉아 쉬면서 불안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요거트 앞에 '스키르'라고 적힌 딱지를 보며 이걸 먹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아이슬란드를 떠난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그러고 보니 떠날 수 있을지를 전전긍긍하느라, 정작 아이슬란드 여행이 끝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10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방문한 곳.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아이슬란드는 다행히 대부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다시 반겨주었다. 변한 건 어차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날씨, 빙하조각들, 그리고 나의 일행뿐이었다.
아이슬란드라는 이 머나먼 나라에 두 번이나, 그것도 친한 친구와 한 번, 또 부모님과 한 번 올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여행은 여행자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좋은 여행을 하고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문지에서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줘야 하는 법이다. 아이슬란드는 내게 매번 멋진 풍경과 대체로 견딜만한 날씨, 그리고 세 번의 오로라까지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 충격적인 아름다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첫 번째 여행이 끝나자마자 다음 여행을 준비했다. 이제 또 세 번째 여행을 준비하면, 또다시 10년이 지나 돌아올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4번째 들어선 이 공항에,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방문이 반드시 있을 것을 믿으며, 스톡홀름행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에 앉아 이륙을 기다리는데, 이코노미석에 앉아있던 젊은 커플이 갑자기 비즈니스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여자분이 몸이 안 좋은 건지, 처음 탑승하며 걸어 들어갈 때도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였던 게 기억이 났다.
이륙을 하고 음료 서비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무원들이 갑자기 의사를 찾았다. 실제로 이렇게 의사를 찾는 경우를 처음 봐서 신기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으로 우리보다 앞줄에 앉은 그 커플의 모습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작은 비행기에는 다행히 의사가 있었지만, 산소호흡기까지 한 여자를 둘러싼 이들의 표정은 모두 걱정스러워 보였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져 만약 레이캬비크로 돌아가야 한다면... 나의 스톡홀름은 그렇게 끝이 나겠지. 하지만 이럴 때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바람 때문에 못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땐 그렇게 조급해지더니, 막상 아픈 사람을 보니까 신기할 정도로 포기가 되었다. 아이슬란드를 뒤로 한 채 떠나는 길이 뒤늦게 아쉬워진 참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행히,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어차피 긴 비행이 아니니 스톡홀름까지 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되었는지, 비행은 계속 이어졌다. 조급할 땐 그토록 신경이 엄청 쓰이더니, 막상 이런 일이 생기자 쉽게 내려놓는 나의 빠른 태세전환이 어이없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었다.
나는 다시 스톡홀름 시내를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구경할 방법을 머릿속으로 반복해서 재생시켰다. 어느새 착륙할 시간이 되었다.
"자! 이제 무조건 빠르게!!"
처음 와보는 스톡홀름 공항을 구경할 새도 없이, 내리자마자 성큼성큼 걸어서 짐을 찾고 호텔을 찾았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단축하면서 비용도 조금 더 아껴보기 위해 고민 끝에 선택한 공항 호텔이었다. 어차피 하룻밤만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었기에 호텔의 시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캐리어를 시내까지 끌고 가느니, 이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근데 공항 호텔 두 곳 중 더 저렴한 곳으로 예약했는데, 조금 더 비싼 곳은 공항 건물에 있지만, 우리가 예약한 곳은 500m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였다! 이래서 가격 차이가 있었나 보다. 제대로 방향 표시도 안 되어있어서 헤매다 다급하게 공항 직원분한테 문의해서 겨우겨우 찾아갔다.
그래도 다행히 체크인은 재빠른 직원을 만나 일사천리로 이루어졌고, 방에 캐리어를 두고 서둘러 다시 밖으로 나오니 오후 4시 15분. 시내로 가는 고속 열차만 빠르게 탄다면 5시 전에도 시내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몰은 아직 한참 남았는데,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 저녁에 비가 잠깐 올 수도 있다고 하더니, 흐려지는 모양이었다. 이 짧은 만남에 비가 오면 너무 아쉬운 일인데... 날씨 요정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타나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속열차 탑승장으로 달리듯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