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라자 - 이영도
밀레니엄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쓰인 책, 드래곤라자. 몇몇은 그냥 판타지 소설로만 알고 있기도 하다. 물론 나 역시 첫 시작도 특별히 다르지 않았다. 판타지 소설이라서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은 판타지 소설이 가질 수 있는 확정성을 너무 잘 활용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유일하게 인정한 책 중 하나가 드래곤라자였다. 그래서 나 역시 다른 판타지 소설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드래곤라자를 읽을 때는 쭈뼛함이 없었고, 당당히 ‘이 책은 국어쌤도 인정한 책이야!’ 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그로부터 근 15년쯤 지난 듯하다. 나는 30살이 넘어서야 드래곤라자 2회 차를 읽기 시작한다. 너무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1회 차일 때는 재미있다는 느낌 말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특히 16권짜리로 나와 있는 책을 읽었는데, 1권 후반 부분에 샌슨이 말과 함께 후치에 타면 된다는 장면에서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의 주요 이야기는 블랙드래곤 아무르타르에게 가져다 줄 보석을 수도의 국왕에게 빌리러 가면서 시작된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저자인 후치가 사는 핼턴트 영지는 왕국 바이서스에서도 특별한 곳이다. 서쪽 웨스트 그레이드에 있는 이 곳은 예전부터 블랙드래곤인 아무르타르에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유난히도 이 곳 핼턴트의 영지민들은 현재를 즐겁게 보내려고 한다. 아무르타르의 영향으로 이 곳에는 유난히도 몬스터가 많이 나오고, 그들에게 언제 죽을 줄 알 수 없으니까.
후치의 어머니 또한 그런 환경 속에서 희생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아무르타르는 후치에게 철천지원수랑 다름 없다. 그리고 후치의 아버지 또한 후치와 마찬가지로 아무르타르에게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9차 아무르타르 원정대가 구성될 때, 그곳에 지원했던 아버지의 심정은 꼭 일생에서 꼭 한번 메카에 가야 한다는 이슬람 교인의 마음과 똑같았을 것이다. 자기가 죽기 전에 꼭 이루어야 하는 일. 그 점을 알기에 17살 후치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드래곤라자에서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타인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소설은 17살의 미성숙한 화자 후치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17살이어야 할까? 어쩌면 17살은 적당히 이치를 알면서도 아직 세상의 때를 많이 묻어있지 않은 나이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더욱이 후치는 다른 영지와 다른 핼턴트라는 특수성이 두드러진 장소에서 자라왔다. 핼턴트는 그 어느 곳보다 인간의 생존의 의지가 강하게 구현된 장소다. 또한 인간이 가지는 분노가 똑같은 인간이 아닌 몬스터 혹은 드래곤이라는 완전한 타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후치는 가장 때 묻지 않은 지성 그 자체가 된다. 마치 처음 세상에 나온 아담처럼.
그렇기에 후치는 가장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분노하기도 하고, 우리와 다르다고 무조건 선입견을 갖기보다는 손을 먼저 내민다. 뒤에 술수를 숨기지 않은 가장 순수한 그 악수에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는 엘프인 이루릴은 반응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루릴은 세계를 대표한다. 그건 칼이 인간과 엘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인간이 별을 보면 별자리가 생기고, 숲을 거닐면 길이 생기고, 바다를 건너면 해로가 생긴다.
그에 반해 엘프가 별을 보면 별이 되고, 숲을 거닐면 숲이 되고, 바다를 건너면 엘프는 바다가 된다.
마치 자정기능을 지닌 자연 같지 않은가? 자연은 언제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자정기능을 지닌다. 그에 반해 인간은 언제나 변화하려 노력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라도 된 것처럼.
드래곤라자의 시작은 비록 보석을 구하기 위한 여행이었지만 후반에 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특히 드래곤라자를 통해서 지상 최강의 생명이라고 하는 드래곤마저 변화시키는 인간의 강한 전염성을 보면서 꼭 바이서스라는 나라의 문제만이 아닌 현재의 인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청지기 사상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생각하려는 태도. 어쩌면 루트에리노 대왕의 사상은 현재의 미국처럼 한 가지에 빠져있는 기관차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루트에리노와 의견을 달리했던 핸드레이크는 다를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인간. 다만 자신의 오류를 알고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일 뿐이다.
나는 드래곤라자라는 책이 좋은 것은 이 모든 것을 가장 먼저 깨닫는 인간이 바로 후치라는 점이었다. 후치는 핸드레이크처럼 굉장하지도 않고, 루트에리노처럼 세상에 큰 변화를 선사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역시 한낯 인간이기에 처음에는 변화하려고 애썼다는 점. 하지만 여행을 통해 그 변화라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굴레의 수레바퀴라면 자기는 그 순간을 조금만,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늦게 맞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이것이 정말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나중에 저기 서쪽 끝으로 날아가는 아무르타르를 보면서 후치는 말한다. 이것 또한 자기 위선일 수도 있다고. 물론 핼턴트에서 아무르타르를 떠나보내는 후치를 보면서 이것 또한 변화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변화하지 않기 위한 후치의 마지막 발버둥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백작의 작위를 얻고도 다시 핼턴트의 초장이 후보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 그는 이번 마법의 가일이 찾아온 모험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주위를 뀌게 만드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돌아왔다. 심지어 자신 또한 타인을 변화시키기도 했으니 (레니의 경우, 후치 일행으로 삶이 바뀌었으므로 일종의 변화라 하겠다.) . 하지만 후치는 그 수많은 변화 속에서 변화지 않아야 하는 것과 변해야 하는 것을 나름 알 수 있었던 것 같다.
후치의 결정과 변화라는 키워드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생각하면 맞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아 혼란스럽다. 어떤 결정이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다면 인간은 그걸 선택할 뿐이다. 테페리의 두 개의 문처럼.
드래곤라자가 대작이긴 대작이다. 특히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왜 판타지를 좋아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판타지는 현실에서 마주하기 힘든 상황을 현실로 만들어 낸다. (물론 소설 속 현실이지만) 내가 또 다른 나와 만나고, 불가능한 위협에 마주치고 그 위협을 헤쳐나가고 등. 드래곤라자는 어쩌면 후치라는 우리 모두를 대표하는 인물의 성장드라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드래곤라자를 읽으며 한 층 더 어제보다 오늘이 더 확신을 가지며 살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