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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 박지리

멈춘 바퀴에서 싹 트는 것은

by 세잇
악은 타인의 칼끝보다 내 안에서 멈춘 바퀴에서 먼저 싹튼다


창으로 쏟아진 빛이 바닥면을 기하학으로 패 쪼개는 장면을 넘기며, 나는 이 세계의 지도를 본다. 가장 밝은 빛 옆에 가장 어두운 그늘이 쫓기듯 붙는. 박지리의 소설은 그 극단의 마찰에서 시작한다. 1지구에서 9지구까지 구획된 사회. 프라임스쿨이라는 엘리트 집단 양성소의 평정과 12월 폭동의 산란함. 사진 한 장의 공백과 사라진 한 명의 아이. '손바닥만 한 파편' 위에 서서 어디로 발을 내딛을지 모르는 다윈 영의 아버지이자 죽은 제이의 친구인 니스 영의 이 감각은 사실 우리 모두의 자세다. 우리는 늘 잘라진 빛과 어둠 사이의 미세한 틈새에 선다.


박지리 작가. 스물다섯에 『합체』로 데뷔해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 『다윈 영의 악의 기원』으로 전혀 다른 방언의 세계들을 구축한 사람. 그는 늘 인간의 본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과 악이 서로에게 뿌리내리는 방식을 쳐다본다. 배경은 낯설지만 감각은 기이하도록 익숙하고 사물의 표면을 공들여 닦아놓은 뒤 그 안쪽의 균열을 보여주는 솜씨가 있다. 문장은 종종 우아하고, 그러나 그 우아함은 현실을 참아내는 오래된 근육에서 나온다.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사진 한 장의 부재로 시작한다. 1지구의 모범생 다윈 영, 죽은 제이 삼촌의 진실을 찾아 나서는 루미, 1지구부터 9지구까지 구획된 사회와 프라임스쿨이라는 공고함으로 쌓아둔 제도를 향해 질문을 날리는 레오, 그리고 국가에 몸을 기대어 선을 재단하고 수선하려는 어른들. 루미는 ‘사라진 사진’이 미싱링크라 직감하고 루미에 이끌린 다윈과 함께 처음으로 1지구의 울타리를 넘어 9지구로 간다. 그곳은 전설처럼 위험하다고 교육받았으나, 실은 '전 지구에서 아무 범죄도 일어나지 않는 유일한 지구'다. 공포의 설계가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지 보여주는 역설. '아버지는 통제와 억압이 없다고 하셨지만, 눈에 보이는 벽을 세우는 것보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통제'라는 다윈의 문장 앞에 나는 오래 멈춰 섰다. 울타리는 항상 밖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훨씬 효과적인 울타리는 내 안에서, 나를 설득해 멈추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진실’이라는 단어가 받는 대우다. '진실의 가치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루미의 아빠이자 죽은 제이의 동생인 조이의 독백은 억세다. 그러나 그는 공허한 냉소를 말하지 않는다. '고통받는 인간의 머리 꼭대기에서 의기양양해하는 진실 따위는 숭배하지 않는다.' 그는 진실 대신 인간을 택한다. 루미 역시 말한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들의 행복을 깨뜨릴 수는 없어요. 그건 정의로운 게 아니라 어리석은 거예요.' 정의가 때로 사람을 파괴한다는 사실, 그 끔찍하게 낯선 진실 앞에, 정의가 무엇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 다시 묻는다. 아마도 정의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인간의 삶이 앞으로도 ‘움직일 수 있도록’ 존재해야 할 것이다. '나쁘게 변한 세계보다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건 사슬에 묶여 꼼짝하지 않는 바퀴'라는 문장은 그래서 이 책의 윤리학이 된다. 멈추게 하는 정의는 악의 사촌이다.


순결의 정치가 불러오는 폭력에 대해서도 책은 오래 응시한다. '제이와 나는 서로의 재판관이 되어 주기로 했다… 맨발로 저울에 올라도 3그램에서 멈추는 순결무구한 인간.' 그 약속이 '태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제이는 무시무시한 재판관으로 변한다. 이미 죽었으니, 변했었다. 완전함을 설계하는 마음이야말로 타인을 벌하고, 결국 자신을 파괴한다. 종교의 자리, 법의 자리, 윤리의 자리를 ‘완전함’으로 채우려 할 때, 세계는 곧장 음영으로 갈라진다. 박지리 작가는 그 위태로운 광휘를 끝까지 보게 한다.


레오의 아버지인 버즈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 어떤 곳보다 공고한 프라임스쿨을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삼아 촬영했던, 오래전의 수도원을 그대로 활용해 사용중인 학교 교정의 하늘은 평정했고, 카메라 속 새는 '양어깨에 돌을 매단 것처럼' 무리하게 날았지만, 맨눈으로 보니 사라져 있었다. 렌즈를 통해 본 현실과 맨눈의 현실. 새를 통해 비틀어 본 프라임스쿨의 엘리트들. 제도는 종종 렌즈를 우리에게 쥐여준다. 더 넓게 보라고. 그러나 렌즈는 언제나 프레임을 동반한다. 어떤 것은 보이고, 어떤 것은 지워진다. 이 소설의 아이들은 렌즈를 내려놓고, 맨눈으로 세계를 보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자기 눈을 갖는 일일 것이다.


'창 없는 답답한 상자를 견디고, 무조건적 순종에 복종하는 척하고, 동류의식의 눈빛에 포섭되는 것'—그 모든 것으로 방은 완성된다. 우리가 학교라 부르고, 회사라 부르고, 가정이라 부르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자주 ‘창 없는 상자’로 변하는지 생각한다. '너도 우리와 똑같은 티슈잖아'라는 눈빛은 달콤한 끈적임으로 다가오지만, 실은 나를 얇게 만들어 한 번 쓰고 버린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장을 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문장은 창문을 낸다. 통풍구 하나라도 스스로 뚫어 놓지 않으면, 방은 곧장 우리를 삼켜버린다.


다윈은 거울 앞에서 '얼굴과 이름과 존재감이 각각 다른 거울의 조각'처럼 어긋난 자신을 본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진화한다는 것은, 누락된 조각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상할 만큼 새로운 조합을 스스로 발명하는 일에 가깝다. 미싱링크는 외부에 있지 않다. 나의 내일이 오늘의 나와 정확히 겹치지 않는 그 틈, 그 벌어진 혀처럼 나를 헐떡이게 하는 시간.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불일치 덕에 살아간다.


죽음에 대한 문장은 유난히 맑다. '인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삶을 사는 것뿐'이고, '삶은 바람 속에 흔들리는 촛불 한 자루'라면,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꺼질 것을 생각하며 떨지 말고, 켜져 있는 동안 무엇을 비출지 결정할 것. 그때의 유효기간은 소설의 말미에 레오의 영결식을 지나 각성한 다윈이 명징한 눈으로 구긴 '놀이공원 입장권’의 숫자처럼 비에 젖어 흐릿해진다. 오래 남기는 것보다 바로 지금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 레오의 죽음 뒤에 나리는 눈송이들이 '무명의 공동 무덤'으로 합쳐지는 풍경도 슬프지 않다. 명예욕이 없는 자연 덕분에 문명이 가능했다면, 우리의 삶도 때로는 무명이어야 더 단단해진다. 박지리는 이름을 거두어들이는 법을 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기다란 묘비명이 아니라 손바닥 안의 작은 온돌 같다.


작품의 내용은 치밀하다.(그래서 책이 900페이지에 가깝긴 하지만.) 12월 폭동의 잔향, 9 지구 후디들의 오래된 얼굴들, 고위 관료의 비밀번호로 열어본 아카이브에서 ‘삭제된 사진’을 확인하는 두 아이, 레오의 궤곡, 그리고 끝내 밝혀지는 진실의 공포. 그러나 이야기가 결국 가리키는 것은 범인의 지문이 아니다. 그것은 방향에 가깝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붙들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 언제는 사람을 살리고, 또 언제는 사람을 망가뜨리는가.


나는 두 개의 문장을 마주 보게 세워두고 굴려본다. 하나는 '바퀴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또 하나는 '진실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움직임과 행복. 그 사이에서 우리는 법과 윤리, 사랑과 책임을 조율해야 한다.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바퀴를 멈추게 하는 신념이라면 경계해야지. 차라리 서툴더라도 바퀴에 손을 얹어보자. 이때의 선은 찬란한 강령이 아니라, 아주 작은 추진력—'오늘을 밀어 올리는 한 칸'의 미세한 이동이다.


박지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완벽한 심판이 아니라 미완의 삶을 택하라고. 순결무구한 인간이 되려 하지 말고 자기만의 조합으로 흔들리며 견디는 인간이 되라고. 촛불이 켜져 있는 동안 당신 문장으로 당신 방에 창문을 더 내라고. 나와 당신의 문장은 그 창문 사이로 드나드는 바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한 장의 사라진 사진을 떠올리며 쓴다.

당신과 나 사이,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미싱링크가 바퀴를 조금 더 굴리게 만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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