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계들은 완성되지 못한 채
"형. 토마토는 과일이게, 채소게."
성해나 작가의 『두고 온 여름』을 펼치며 처음 밑줄 그은 문장입니다. 평범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 문장 안에는 어쩐지 형과 동생 사이의 미묘한 거리감이 담겨 있더라고요. 피 하나도 섞이지 않은 동생인 재하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중국냉면 국물에 땅콩 소스가 섞이지 않게 살살 젓가락질하며, 답 없이 무뚝뚝한 형 기하에게 이어서 이야기합니다.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인데 법적으로는 채소래. 웃기지?
근데 난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봐. 과일이든 채소든.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이야."
토마토가 과일인지 채소인지를 묻는 재하의 질문은, 아마도 간접적인 물음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형제인지 아닌지, 가족인지 아닌지. 그런 식의 분류와 정의가 정말 중요한 건지. 재하의 마지막 말처럼, 정말 '그런 게 다 무슨 상관'일지 말이죠.
성해나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두고 온 여름』을 읽으며 저는 계속해서 이런 질문들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관계라는 것의 복잡함과 불완전함에 대해서요.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성해나 작가는 『빛을 걷으면 빛』, 『혼모노』 등의 소설집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는 박정민 배우의 추천사 덕분에 『혼모노』를 쟁여두고 있는데요. 『두고 온 여름』을 읽고 나니 어서 펼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지지만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까 싶어서요. 상처받는 일에는 쉽게 무뎌지면서도, 정작 누군가의 따뜻함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하는 마음. 작가는 이어서 말합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까, 멀어져 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두고 온 여름』은 부모의 재혼으로 잠시 형제가 되었다가 다시 남남이 되어버린 기하와 재하의 이야기입니다. 기하의 아버지가 재하 모자와 재혼하면서 만들어진, 어색하고 불완전한 가족관계. 그들은 함께 살았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나누지는 못했죠. 기하에게는 갑작스럽게 생긴 새로운 가족이 부담스러웠고, 재하에게는 마음을 닫고 있는 형이 안타까웠을 거예요.
작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들려줍니다.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되는 두 사람의 기억들. 서로를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닿지 못했던 진심들. 그 과정에서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머니의 울음
"한 말을 하고 또 하다 어머니는 돌연 말을 멈추었습니다. 그녀의 어깨가 조용히 떨렸습니다."
재하의 어머니가 우는 장면이 유독 남습니다. '고여 있던 것을 흘려보내듯 잠잠히' 우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재하가 깨달은 것은,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울음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 어떤 울음은 정말로 마음을 비워내는 역할을 하지만 어떤 울음은 그저 슬픔을 희석시킬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해나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해 냅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아 정말 그런 마음이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죠.
재혼 가정의 어머니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조심스러웠을까요. 새 남편의 아들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자신의 아들 재하는 또 어떤 마음일지 헤아려야 하는 복잡함. 그 모든 감정들이 희석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마음에 쌓여가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완전하지 않음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소설 속에서 이 문장이 반복될 때마다 저는 계속 멈춰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는데 뭔가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것 같은 그 허전함. 기하와 재하에게는 서로가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짜 형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남처럼 지낼 수도 없었던 애매한 관계. 마음을 다 주지도, 완전히 거두지도 못한 채 남겨둔 그 시간들.
인릉의 홍살문을 지나며 기하의 아버지가 한 말도 기억에 남습니다.
"산자도 망자도 이 문으로 드나든단다. 보이냐 너희도?"
아버지는 뜬금없는 말을 던지고 허공을 바라보죠. 무언가 서 있는 것처럼. 어쩌면 아버지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만들려 했던 가족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그 불완전함 속에서 서로가 상처받고 있다는 것을요.
십오 년 만의 재회
소설은 십오 년 후 기하와 재하가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스트리트 뷰에서 우연히 발견한, 예전 동네의 중식당에서 본 재하 모자의 모습. 기하는 '묵은 감정들이 사라진 자리에 희미한 부채감'만 남은 마음으로 재하를 찾아갑니다. 이제는 '반갑고 은근히 그리운 마음'을 안고 말이죠.
하지만 재회는 복잡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예전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라진 재하의 모습, 더 이상 세상에 없는 어머니의 소식, 아버지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기하를 혼란스럽게 만들죠.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은 그것이 유일합니다.'라는 문장을 읽으며, 문득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사진 속에서 세 사람은 손을 맞잡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그 순간이 영원하지는 못했죠.
"우리가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린 것들, 가중한 책임을 이기지 못해 도망쳐버린 것들은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꿈결같이 묘연한 한여름의 오후만이 남습니다."
성해나 작가가 건네는 위로
성해나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넵니다. 모든 관계가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 때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 주는 것이 불가피함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완전함 자체를 부드럽게 껴안으라고 말하는 것 같거든요.
'이편에서 왔다가 저편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 어딘가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기어이 마음을 헤집어놓는 것들.'이라 표현한 문장처럼, 우리 삶에는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났다가도 사라지는 관계들이 있고, 때로는 그것이 우리 마음을 깊이 흔들어놓기도 합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는 것도, 다가가려 하지만 어색해하는 것도 모두 그런 관계의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가 택할 수밖에 없는 방식들인 것이죠.
소설 말미에 기하와 재하가 인릉을 함께 걸으며 나누는 대화들을 읽다 보면, 이들이 과거와는 조금 다른 현재도착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전히 완전하지는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예전보다 더 너그러워진 것 같거든요.
"그때는 형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두고 온 여름이 건네는 인사
『두고 온 여름』은 섣부른 비관이나 막연한 긍정 없이 삶에서 놓친 순간을 조심스레 돌아보고 건져 올린 눈부신 결과물이라 생각합니다. 상처 주고 상처받은 과거를 한 장면 한 장면 곰곰이 되짚는 동안 자책과 후회, 미련과 원망이 가슴에 생겨나지만, 그로 인해 피어나는 살핌과 헤아림이 실패한 관계를 뒤늦게나마 따뜻하게 감싸 안습니다. 설령 관계가 다시 원만해지거나 감정이 복원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삶에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도록 열어두는 것이죠.
이 소설을 읽으며 저는 '치유의 과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처를 외면하거나 억지로 잊으려 하기보다, 그 상처를 직시하고 짚어보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과거와 화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때로는 그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아 아파하고, 때로는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진심 때문에 후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고 온 여름』은 그런 우리에게 따스하면서도 잔잔한 위로를 건넵니다. 모든 관계가 완벽할 수 없고, 모든 감정이 해소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인연과 마음을 소중히 여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두고 온 여름』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두고 온 여름'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관계였든, 어떤 감정이었든, 그 모든 것을 따뜻하게 보듬어 안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건네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분들이 자신의 '두고 온 여름'에 애틋한 안부를 건넬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