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미 Oct 11. 2022

김태리 예찬론,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내가 사랑했던 모든 인물들에게 #1 <김태리>

스무살 여름, 성인이 된 기념으로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관람했다. 교양 수업에서 만난 철학과 남자아이를 조금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영화를 보자고 연락했다. 불행하게도 그 아이는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내가 고른 영화는 <아가씨>였다.(변명하자면 나는 분명 <아가씨>를 보자고 말했고, 그는 그러자고 했다.) 장면이 전환될 때 마다 괴로워하던 그 아이는 특정 장면에서 팝콘을 쏟은 후로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그 날 이후, 그 아이와는 연락이 끊겼다. 하지만 나는 괜찮았다.


김태리를 만났으니까.

상반된 이미지의 '나희도'와 '장 선장'

맹랑한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세상을 속여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속는 줄도 모르는 순진한 숙희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김태리는 다양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독재정권 아래에서 개인적 성장을 거쳐 투쟁에 참여하는 <1987>의 연희로, 사대부 영애이지만 밤이 되면 의병 활동을 하는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으로, 청춘을 대변하는 <리틀포레스트>의 혜원, <승리호>의 장 선장과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나희도를 거쳐 <외계+인>의 이안으로. 어느새 김태리는 이름만으로도 흥행을 보증하는 배우가 되었다. 새로운 배우가 쏟아지는 이 치열한 시절에 김태리는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은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김태리 팬덤의 일원이 되어 ‘김태리 하세요!’를 외치고 있는가?


김태리가 1500:1의 경쟁률을 뚫고 <아가씨>의 주인공이 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따지고보면 그녀는 영화 데뷔는 박찬욱과, 드라마 데뷔는 김은숙과 함께한 행운아이다. 김태리는 박찬욱과 김은숙이 만든 신데렐라일까? 나는 단번에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김태리는 만들어진 무언가가 아니다. 반대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는 주체이다. 정서경 작가는 “숙희를 표현하는데 너무 놀랐다. 숙희가 가진 용기,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폭력에 대한 분노, 이런 게 사실 지문에는 들어 있지 않은데 배우가 가진 에너지만으로 완벽하게 표현했다.”고 그녀의 연기를 평했다. 김태리의 연기는 인물을 살게 한다. 자신이 숨을 불어넣을 대상을 영리하게 고르고 소화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힘을 쭉 빼고 인물에 접근하는 그녀의 연기는 관객을 극 속으로 농밀하게 끌어당긴다. 

그 원천은 철저한 계산이나 기교보다는 동물적인 감각에 가깝다. 오랜 극단 생활로 다져진 발성, 유연한 호흡과 강렬한 눈빛이 그것을 증명한다. 김태리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럼에도, 김태리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지금껏 이렇다 할 첫사랑도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을 평생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있을 정도.”라고 인터뷰하는 김태리는 그 자체로 귀하다. 창작자로서의 결핍을 종영 인터뷰에서 단숨에 털어놓는 솔직함이라니! ‘사랑을 몰라요.’라고 말하는 것이 내숭이 아닌 꾸밈없는 고백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담백함이라니!

해본 적 없는 사랑도 빚어낼 수 있는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 나는 김태리를 그렇게 일컫고 싶다.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그녀의 주체성은 본 데 없이 아름답다. 느낀 적 없는 감정을 전달하고, 가진 적 없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을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연기와 거짓말을 한끝 차이라고 했던가? 나는 그녀의 유려한 거짓말에 매번 기꺼이 속아넘어간다. <아가씨>의 히데코처럼. 

김태리의 리커버북 커버 사진

김태리는 연기실력 뿐 아니라 자신만의 소통방식으로 팬들을 열광케했다. 매일 올려주는 셀카나 팬미팅은 없었지만 그녀는 남다른 방식으로 팬들을 찾아왔다. 바로 오디오북 프로젝트 <김태리의 리커버북>이다. 쉐어하우스에 살던 시절, 나는 <김태리의 리커버북>을 들으며 잠에 들고는 했다. 그녀가 들려주는 고전 속에서 나는 나만의 공간을 찾았다. 고된 하루를 보내도 밤이 되면 세상이 나에게 들려준 하찮고 버거운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밤에 광합성하는 식물이 된 것 마냥, 이불 속에서 영양분을 채우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봉사 활동으로 오디오북을 녹음한 경험때문에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김태리의 인터뷰 마저도 다른 모양의 용기를 준다. ‘선한 영향력’의 범주 속의 대상을 좋아하고 있다는 안도감. 현대인에게 그런 감각은 중요하다. 


직업인 김태리에게 빠져버린 나는 ‘생활인 김태리’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는, 큰 차를 운전하며 하루에 두 번은 휴대폰을 떨어뜨리는 이 여자는 어떻게 내 마음을 훔쳤는가? 이 둥그런 지구에 어떤 족적을 남기며 살아왔는가? 그녀의 인터뷰를 모조리 찾아보았다. 맙소사! 생활인 김태리의 매력은 또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직업인 김태리가 갓 자라난 노지 토마토 같다면, 생활인 김태리는 줄기가 길게 뻗은 고구마 같달까. 단단한 뿌리와 유연한 줄기를 가졌으면서도 나약함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평범한 존재였다.


서울에서 실패하고 시골로 도망친 <리틀포레스트>의 ‘혜원’처럼 도망치고 싶은 때가 있었냐는 질문에 “연기할 때마다 도망가고 싶다.”고 답한 그녀는 “모든 사람이 언제든지 자신이 하는 일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인다. 연기가 아니라 다른 일을 해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다는 그녀의 주장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자신을 ‘강한 배우’라고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을 가볍게 배신하는 이 인터뷰가 김태리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거창하고 비범한 말에 목매지 않는 김태리의 진솔함은 2022년의 대한민국에서 만나기 어려운 것이라 반갑다 못해 고맙기까지 했다.

사랑스러운 모습의 김태리

<스물다섯 스물하나> 종영 후 직접 기획하고 촬영해서 업로드한 브이로그 <거기가 여긴가?>에서 이런 생활인 김태리의 매력을 마음껏 찾아볼 수 있다. 요상한 변장술을 곁들인 김태리는 배가 고플 때는 밥을 먹고, 느닷없이 도라에몽 성대모사를 하고, 모르는 것이 생기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질문을 하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행복한 마음이 들 때마다 항상 슬픔이 같이 와요. 너무 행복한데, 그래서 슬퍼요. 왜인지는 모르겠어.”라는 아리송한 말도 덧붙인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행복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으므로. 행복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라진다. 불행에 잡아 먹히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며 소멸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걸 미루어 짐작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지만 김태리는 콕 집어 그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며 깔끔한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울고 웃다가 갑자기 피리를 부는 이 특이한 여성이 주는 행복도 언젠가는 증발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지하철 2호선처럼 돌고도는 행복과 슬픔의 굴레를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행복에서 도망치면 슬픔, 슬픔에서 도망치면 행복이니까. 그것이 김태리가 나에게 알려준 인생이 살만한 이유이다.


정말 힘든 순간에 나는 ‘if 김태리’ 방법을 쓴다. 내가 김태리였다면 여기서 어떻게 했을까? 내가 나의 가장 단단하고 솔직한 구석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쓰는 최후의 비기같은 것이다. 사실 ‘좋아하는 것’을 소개하라는 과제에 사람을, 그것도 연예인을 적는 게 맞나 고민했다. 그렇지만 ‘if 김태리’ 타임을 가진 후 나는 결정했다. 가장 정확한 애정을 담자. 그러고 나니, 분명하게 말 할 준비가 되었다.


사랑하게 되실 거예요. 김태리를.


* * *


우아한 형제들 신입 채용 사전과제로 작성한 글입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청춘시대]연대하는 여성과 방해하는 남성에 대하여②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