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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ㄴㅈㅇ May 22. 2018

결국엔 끝이 날 걸 알면서도..

『라라랜드』데이미언 셔젤


「라라랜드」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마주친 두 사람에 대한 영화입니다. 요약하자면 ‘좌절과 희망 속에서 사랑과 꿈을 쫒는 영화’라고 할까요. 셀 수 없을 만큼 봤던 작품이지만 아직까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뒤의 후유증이 심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꿈과 사랑을 놓고 미아와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지켜볼 때면 영화 속의 분절점처럼 사랑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겪어내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리고 결말에서 happily ever after(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플래쉬백 장면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네요.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사랑이 절정으로 치닫는 중반까지 극 중 두 사람은 천생연분인 것처럼 보입니다. 세바스찬은 멈춰있는 미아에게 몇 번이고 클락션을 울리며 자신만의 꿈을 쫒아가라며 독려하고, 미아는 끊임없이 세바스찬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줍니다. 데이트 몽타주도 짧은 시간에 꽤나 정교하게 짜여 있습니다. 우리나라 멜로드라마가 으레 저지르는, 괜히 콧등에 아이스크림 묻히는 등의 허접한 연출이 아니라 LA 곳곳의 정경을 아름답게 담아내어 그들의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영화의 끝맛은 씁쓸합니다. 제게는 미아와 세바스찬이 어떻게든 헤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꿈은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꿈입니다. 서로 독려는 해줄 수 있을지언정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치면 여지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미아를 상징하는 영화와 세바스찬을 상징하는 재즈는 쉽사리 섞이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나아가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사랑보다는 꿈을 선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종반부 그리니치 천문대에서의 장면이 이 사실을 잘 드러냅니다. 오디션이 성공적인 것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미아의 파리행이 거의 확정된 상태입니다. 미아는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쯤에 있냐고. 세바스찬은 그제야 미아에게 보이스로 가자고 했던 자신의 말이 얼마나 경솔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아니, 그 전에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세바스찬이 미아에게 했던 그 말은 자신의 꿈에 미아를 맞추거나, 사랑을 위해 미아의 꿈을 포기해라는 말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왔죠..?


천문대에서 우리가 어디쯤에 있냐고 묻는 미아도 세바스찬이 파리로 따라와서 새롭게 시작했으면 하는 기대를 어렴풋이 가지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후 미아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플래쉬백 장면에서 세바스찬이 파리에서 연주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미아도 자신의 본심을 선뜻 말하지 못합니다. 이전에 자신에게 똑같은 말을 했던 세바스찬을 비난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니치 천문대에서의 대화를 통해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꿈을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자, 꿈이라는 가치가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세바스찬은 미아로 인해 밴드활동이 자신의 꿈이 아님을 깨달았고, 미아는 세바스찬의 도움으로 파리에 가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이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려고 하는 순간 두 사람의 사랑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서로의 사랑으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게 되었는데, 오히려 둘의 사랑은 어디쯤에 있는지 모르게 된 그들에게는 이별밖에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이 깨져버린 두 사람에게는 이미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습니다. 황홀한 데이트가 있었던, 첫 키스의 추억이 있는 그리니치 천문대를 보고서 별 다름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땐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이던 그 장소가 사랑이 깨지고 민낯이 드러나자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이별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지만 이미 천문대에서 둘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낭만과 비감으로 교직하는 마법같은 순간     


우리는 살면서 지나가버린 순간들을 떠올려보곤 합니다.


만약에 거기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우리가 서로를 좀 더 믿었다면.

만약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기에 무엇이든 되돌리고 싶은 간절한 순간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겠죠. 하지만 켜켜이 쌓아올린 ‘만약에’를 통해 우리가 움켜질 수 있는 거라곤 지나간 순간의 달콤한 감정이 아니라 허무함과, 씁쓸함과, 일말의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만약에’라는 주문을 환상적으로 표현해냅니다.


미아가 세바스찬의 연주를 보면서 그녀는 수없이 많은 ‘만약에’라는 주문을 외웁니다.


만약에 그가 키이스의 제안을 거절했다면,

만약에 그가 내가 하는 연극에 와줬더라면,

만약에 그가 파리에 따라 가줬더라면,

만약에 그가 파리에서 재즈를 했다면,


‘만약에’로 이루어진 장면들이 몽타주로 짜여서 한꺼번에 펼쳐지는데, 플래쉬백 장면들을 아름답게 보이지만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 많은 장면들 중 실제로 일어난 것들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즉, 미아가 상상하는 장면들은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이별원인이 되었던, 그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연주하는 동안 상상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상상도 자신의 꿈인 '영화'라는 방식으로 재현됩니다. 즉, 미아가 상상했던, 그리고 원했던 현실은 세바스찬의 꿈인 음악과 미아의 꿈인 영화가 함께 펼쳐질 때만 가능했던 해피엔딩이었습니다.



'만약에 세바스찬이... 했더라면' 미아의 상상 中


미아는 마지막에 한 곡 더 들을까 고민도 하는 눈치였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비록 1여년의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진심으로 사랑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미 끝난 사랑이니까요. 미아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각자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각자의 꿈을 쫒는 것이 두 사람에게 남겨진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아가 퇴장한 뒤 카메라는 세바스찬을 비춥니다. 세바스찬은 무대를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한 때 뜨거웠던 사랑은 떠나고 없지만 자신이 추구했던 꿈을 이어가며 살아갈 것이라는, 마치 다짐처럼 들리는 박자를 세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한 여자를 사랑하며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모습이 아니라 재즈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세바스찬도 그의 꿈을 계속 쫒아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고속도로에서 세바스찬이 미아를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가, 재즈클럽에서 미아가 세바스찬을 스쳐지나가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 수미쌍관의 구조는 사랑이 찾아왔다 떠난 그들에게 이제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City of stars


영화의 주제가인 'city of stars'는 극 중에서 여섯 번 정도 등장합니다. 이 음악이 쓰일 때 마다 편곡이 조금씩 달라지데, 가장 크게 차이점을 느꼈던 부분은 미아와 세바스찬이 함께 불렀던 세 번째 장면과 마지막 여섯 번째 장면의 대비입니다. 세 번째 장면에서는 두 사람의 달콤한 화음이 그들의 사랑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바스찬이 혼자 부른 버전에서는 ‘자신이 이루지 못할 꿈’으로 끝나지만 미아와 함께 부르는 버전에서는 미아가 그 부분을 ‘꿈이 이제 이루어졌다고(finally come true)’로 가사를 바꾸어 받아 부르며 노래를 이어갑니다. 합주 또한 풀오케스트라 구성으로 그들의 사랑이 곧 열매를 맺을 것처럼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city of stars'가 여섯 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미아가 혼자 부른 버전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타 반주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노래조차 가사가 없는 허밍으로 이어갑니다. 매번 감상을 하고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것을 볼때면, 그리고 그때마다 가사 없는 미아의 허밍을 들을 때면 이제 미아 곁에는 더 이상 피아노를 쳐주던 세바스찬이 없으며, ‘그토록 사랑에 빠졌을 때는 내 이야기 같았던 노래가 이제는 세월이 흘러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미아는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허밍으로 부르는 것일까요.


가사조차 생각나지 않는 희미한 그들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세바스찬에게는 ‘Seb's’라는 이름이, 미아에게는 재즈일거라 생각됩니다. 어쩌면 이처럼 우리에게도 한때 열렬했던, 그럼에도 스쳐지나갔던 사랑이 'Seb's'와 같이, 혹은 그 어떤 것에 대한 호불호와 같이 조용히 남아있을 겁니다. 그리고 가끔씩, 혹은 불현 듯 그 존재를 눈치 채고는 ‘만약에’라는 주문을 외워보는 것이겠죠. 비록 이 영화처럼 아름답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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