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다
대학 다닐 때 미술부 서클 활동을 했다는 친구가 늦은 나이에 풍경화 그리는 나를 보고 부럽다고 했다. "나는 승부욕이 강해서 문제야. 20년 동안 카피라이터로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은 글을 잘 써서가 아니야. 실력이 없는데 살아남아야 해서였어. 정말 노력했어. 카피를 잘 쓰기 위해 죽을 만큼 열심히 했어. 근데 글을 잘 써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 마케팅 전략을 공부한 덕분에 밥 먹고 살 수 있었어. 지나고 보니 글, 그림 둘 다 노력해서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잘하고 싶은 마음만큼 되지 않아 결국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어.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그림을 버린 거지.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가끔 생각해."
친구와 넋두리를 나누면서 둘이 내린 결론은 '열심히 하지 않기'이다. 지금도 교보문고에 가면 책 매대 한편을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작가 책처럼 우린 '너무 열심히 살아서' 문제인 시대를 살아내느라 삶의 기쁨을 홀라당 저당 잡히고 말았다.
컬러링 북을 산 적이 있다. 지인이 만다라 색칠을 하면서 삶의 기쁨을 느끼네 어쩌네. 색칠하면서 색감이 매력적이어서 하루 시작을 생동감 있게 한다는 말을 듣고 혹해서 샀다. 교보문고에 가서 좋아하는 그리스 풍경 컬러링북 하나와 섬세한 선으로 그려진 만다라 컬러링 북, 두 개를 샀다. 그날로 색칠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지인은 그날 기분에 따라서 색을 칠하다 보면 전환도 되고 회복도 된다면서 만다라 컬러링북을 추천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컬러링 북은 나에게 스트레스 자체였다. 색칠 샘플 교본이 있고 그대로 칠하든 자기 마음대로 칠하든 알아서 선택할 수 있다. 샘플 교본이 있으니 교본 따라 색칠을 하게 됨은 물론 빈 곳 없이 칠해야 한다는 강박, 한번 색칠할 때 완성해야 한다는 조바심까지 갈수록 색칠이 즐겁지 않았다. 아! 이것도 있다, 책을 샀으니 성실하게 날마다 채워 색칠해 한 권을 끝내야 한다는 강요까지 우하하!.
'이걸 사서 왜 이런 스트레스를 사서 하지?' 고민하다 어느 날 컬러링 북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처박아 버렸다. 한참 잊고 있다가 다시 잡았는데 불편함이 여전히 스멀스멀 올라 왔다. 순간 벌떡 일어나 책을 북북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시 주워서 칠하지 못하도록 잘게 찢었다. 이런 내 모습을 떠올리니 미친년 같다. 열심히 하지 않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성실하게 끝까지,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잘라내기 그렇게 어렵다니, 열심히 하지 않고, 성실하게 하지 않는 모든 습관때문에 결국 실패한 인생이 될 거라는 저주의 말이 들린다. 참고는 아버지에게 똑 똑 떨어지는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말을 날마다 듣고 살았다.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명문대 진학을 한 장녀이다.
'유럽의 그림책 작가에게 묻다' 책에 나오는 작가 키티 크라우드(유럽에서 아동문학계 노벨상이라는 별명)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로서 어떻게 하면 아이의 즉흥성과 원초적인 창작 에너지를 가급적 오래 보존해 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따라 그리기를 피하는 겁니다. 상업화된 어린이 그림 노트, 색칠 공부 등에서 전형적인 코드를 배우게 돼요. 차라리 빈 종이를 쥐여주고 지금 느껴지는 기분을 표현해 보라고 하는 게 낫죠"
최근 어반 스케치가 유행이다. 수채화 채색을 배워본 기억이 없어서 어반 스케치 채색 클래스에 참여한 적이 있다. 첫날 수업은 물감에 물을 섞어 색의 농담을 표현하는 연습을 했다. 두 번째 시간부터는 프린트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시간이었다. 나무, 집, 길가 풍경으로 기억된다. 선생님이 나눠준 프린트물을 보고 따라 그렸다. 2시간 동안 그리면서 집중하는 시간이었지만 끝날 무렵 다소 피로감이 느껴졌다. 집에 오면서 왜 나눠준 프린트 그대로 그렸지? 내 마음대로 그려도 되는데 꼭 그대로 따라그리는 자신에게 다음부터는 네 마음대로 그려보라고 말해주었다.
백지가 두렵기도 하지만 백지에 마음대로 그릴 때 기쁘다. 내 마음대로 색을 섞어 그릴때 색이 주는 에너지, 기쁨이 있다는 걸 알게됐다. 누구 흉내를 내거나 비슷하게 그리려 애쓰면 즐겁지 않다. 지금 이 나이에 그림을 왜 그리고 싶은가? 무엇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가?
'유럽의 그림책 작가에게 묻다' 책에 나오는 작가 키티 크라우드는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창작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독특하고 훌륭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표의식이 있는 경우가 많다. 제 유일한 창작의 목표는 기쁨이다. 저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이 일을 합니다. 이 색을 칠해보고 싶어, 이렇게 그려보고 싶어, 이런 가슴 뛰는 충동과 설렘, 기쁨이 없다면 무엇을 창작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 창의적이라는 단어는 기쁨의 동의어입니다." 유럽 그림책 작가에게 묻다 작가의 인터뷰에서 답을 찾는다. '스스로의 기쁨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 일을 할 때 기쁜가? 기쁨이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일에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