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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가은 Jan 11. 2021

자취할 때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사실 사람이 고팠다.


장보고 요리하고

차려먹고 치우기




혼자 살면서 새롭게 존경하게 된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혼자서도 밥을 정성스레 예쁘게 정갈하게  차려 먹는 사람들.  자취할 때 잘 살기 위한 요소 3번째는 <  먹기> 정했다.


<리틀 포레스트> 혜원의 김치수제비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이 한 대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배고파서 돌아왔어." 치열하게 살던 서울살이를 내버려 두고 불편한 시골로 온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배가 고팠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울었다. 편의점 도시락을 먹던 혜원이가 저렇게 건강한 식재료를 예쁜 그릇에 놓고 먹는 그 모습이 너무 대견스럽기도 하고, 오랫동안 알던 친구와 만나 활기를 되찾아가는 것도, 자신을 되찾아가는 그 과정도 어쩐지 너무나 위로가 되고 공감도 됐기에. 나도 배가 고팠고, 사람이 고팠던 시절이 있었기에.


이직한 광고회사에서 제법 자리를 잡아갈 즈음에도 나는 여전히 내 자취방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오후 5시가 되자 하나 둘 짐을 챙겨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애써 밝게 인사만 하고선 다시 우중충한 얼굴로 느릿느릿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야속하게도 내 반지하 자취방은 회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기 때문에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5시 반에는 도착해버리곤 했다. '야속하다고? 아침에는 10분 전에 나와도 지각 안 한다며 방방 좋아했으면서.' 집이 나를 욕한 대도 어쩔 수 없었다. 역시 사람이란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이 다르구나. 크게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했다.


내가 느릿느릿 걸을 때는 바로 저녁 약속이 없는 날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을지로까지 왕복 3시간 출퇴근하는 딱한 남자친구랑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친구는 집 가면 녹초가 되어버리니 평일에는 되도록 저녁 약속을 잡지 않았다. 그나마 몇 없는 친구들도 퇴근시간이 7시여서 그들과 저녁을 먹으려면 내가 2시간은 쫄딱 굶으며 기다려야 했다. 굳이 약속을 왜 잡아? 혼자 자취방에서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편하게 쉬는 게 얼마나 좋은데.라고 나도 처음엔 생각했다. 그러나 호기롭게 퇴근길에 마트에 들른 날이면 나는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마트를 2바퀴나 돌았는데 내 카트에 담긴 건 고작 첵스, 요거트, 냉동피자 같은 것들이었다.


엄마는 늘 내게 요리하는 법을 배우라고 얘기하셨다. 사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 능력은 '요리'라던 엄마의 얘기를 학창 시절에는 그냥 흘려들었다. 그때는 그냥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내가 요리를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만했다. 마트에서 무수히 많은 재료들을 봐도 나는 오늘 저녁에 어떤 요리를 해야 하는지 연결 짓지 못했다. 막상 <만개의 레시피> 같은 앱을 다운받아서 특정 요리를 하려고 하면 사야 하는 재료가 너무 많아서 배달시켜먹는 게 더 저렴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큰 맘먹고 재료들을 사면 손질하고, 다듬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는 이 과정을 하느라 저녁 내내 쉬지를 못했다. 남는 재료들은 냉동고로 넣었지만 한번 들어간 재료들은 결국 음식물쓰레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느릿느릿 퇴근하는 길에 늘 배달앱을 켰다. 오늘은 삼겹살 덮밥을 먹고 싶어서 주문하기를 눌렀다. 삐빅- '최소 주문금액이 부족합니다.' 하. 그럼 그렇지. 그래 하나 더는 오징어덮밥 추가할게. 됐냐?! 지금은 1인분 배달하는 집이 많아졌지만 3년 전 그때는 한 끼 배달해주는 곳은 정말 없었다. 결국 나는 2끼를 배달시켜서 하나는 다음날 저녁에 맛없게 먹어야 했다. 이 마저도 나한테는 너무 많은 양이어서 버려야 하는 음식들이 너무 많았다. 아으 지겨워. 배달음식 물려. 내가 외부음식을 물려하는 날이 오다니. 진짜 직장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쉐어하우스에 살 때는 줄 곧 주방에서 이것저것 만들어먹었었다. 서로 많이 친하지는 않았지만 때 되면 느릿느릿 부엌에서 나와 뚝딱 뚝딱 밥을 짓고 때꼰한 얼굴로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혼자 식탁에서 밥을 먹더라도 누군가는 티비를 보고, 누군가는 샤워를 했다. 지나가다가 스윽 보시며 "아이구 라면 먹으면 어떡해? 그걸로 저녁이 되나?" 한소리 하며 김치를 꺼내 주시던 주인아줌마도 없으니 밥이 맛이 없었다. 입맛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그냥 간편식이나 데워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우곤 침대에 누웠다. 어쩔 땐 그냥 과자만 먹거나 젤리를 먹고 잠에 들기도 했다.


방바닥만 뜨거운 온기 없는 일상. 청주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다. 지금이라도 하우스메이트를 구해볼까. 남자친구는 집에 가면 부모님도, 형아도, 강아지도 있는데. 같이 웃으며 티비보고 밥 해 먹고 게임하고 놀겠지? 부럽다. 부럽다. 나도 어디든 껴서 저녁 먹고 싶다. 참 나. 독신주의가 좋다면서. 나는 참 모순덩어리구나. 다시 땅으로 꺼져가는 나를 애써 붙잡지도 않으며 하염없이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 밤. 그렇게 자주 굶고는 우울함을 삼켜내는 밤. 자취할 때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아니 사람이 고팠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밤 조림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어떤 유튜버가 한 말을 보고 깨달은 게 있다. 우울함을 치료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스스로에게 가장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한다.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수고롭게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예쁜 그릇을 꺼내어 플레이팅하고, 잘 먹고, 잘 치우는 이 과정들이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사는 첫걸음이라고 했다. 머리를 띵 맞는 느낌이었다.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데 굳이 그렇게 해 먹어야 해? 하면서 요리했던 프라이팬 그대로 집어 먹다가, 귀찮아서 밀키트를 사다 먹다가, 나중에는 배달음식을 먹다가, 그마저도 안 먹거나 때우곤 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내가 먹는 음식을 그렇게 허술하게, 빈약하게, 영양가 없이, 소중하지 않게 보내버렸으면 안 됐던 거다.


그렇기에 그 시간들이 힘들었구나. 지나고 나니 자취할 때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들이 너무 많았다. 나를 나 혼자 대하는 게 처음이라 서툴렀다.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저 작은 밤 조림 몇 개 먹으려고 12시간 동안 새벽까지 밤을 휘휘 젓고 쳐다보는 혜원이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는 너무 멋지게만 보인다. 자신이 먹을 것을 위해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멋지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니까. 지금은 남편과 같이 살고 있지만 혼자 먹는 날에도 열심히 해 먹어보려고 한다.




이제는 혼자서 긴긴 시간 우울함에 나를 졸이지 않을 거다.

그럴 바엔 차라리 밤을 졸여보자.

분명 배는 덜 고플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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