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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Mar 26. 2018

떠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레이디 버드>

이토록 사랑스러운...

제목: 레이디 버드

감독: 그레타 거윅

출연: 시얼샤 로넌(레이디 버그 役), 로리 멧칼프(매리언 맥퍼슨 役), 비니 펠드스타인(줄리 役), 티모시 샬리메(카일 役), 루카스 헤지스(대니 오닐 役)

#1시간 34분 #드라마 #코미디 #세젤귀 #사랑스러운 


*해당 리뷰는 [브런치 무비 패스]의 지원으로 시사회에 참석하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해당 리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스포일러가 미운 분들은 영화 관람 후에 찾아와 주세요 ㅠ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영화를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이 오조오억 번 넘게 들었다. 영화의 모든 부분들이 '나 귀엽지 않아요?'라고 외치고 있는 듯했다. 보고 있는 내내 입꼬리가 계속 올라간다. 로맨스나 코미디를 볼 때 짓는 미소와는 다른 느낌의 미소를 짓게 한다. 구태여 표현해보자면 입꼬리는 올라가는데 큰 웃음은 나지 않고 '흐흐흠'하게 되는?(뭔 느낌인지 알죠?) 이를 여실히 느낀 게 <레이디 버드>는 상영 내내 관객들의 소소한 웃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레이디 버드와 그녀의 절친 줄리. 둘의 케미에 귀여움이 폭발한다.

 

 내가 왜 이렇게 <레이디 버드>를 설명하는 데 있어 귀여움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영화니까 꼭 보세요. 두 번 보세요"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일말의 사명감까지 느낀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아마 대사의 지분이 가장 크지 않나 싶다. <레이디 버드>는 씬마다 대사의 공백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수다스러운 편이다.

 그 수많은 대사들은 레이디버드가 느끼는 순간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대체로 투덜대고 실증 내는 게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그 대사 하나하나에 깨알 같은 재치가 가득하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관객들 고민하게 만드는 뼈 있는 대사들 날려주니 그 변덕스러움에 완전 매료되고 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대사 하나하나가 변덕스러웠던 우리들 10대의 정서 같아서 어디로 튈지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레이디 버드>와 <우리의 20세기>의 평행이론?   

 

마이크 밀스 감독의 <우리의 20세기> (2016作). 붉은 머리를 한 사람이 그레타 거윅이다.

 

 <레이디 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은 마이크 밀스 감독의 <우리의 20세기>에 주연 애비 役을 맡은 바 있다. 또한, <우리의 20세기>는 제 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레이디 버드>는 제 75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배급사도 유명 배급사인 A24로 같다. 그러나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 스토리 부분에 있어 두 영화는 닮은 구석이 꽤나 많다.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레이디 버드와 <우리의 20세기>의 주인공 제이미. 세상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주인공이 둘 다 십대의 끝자락에 있다: 닭과 병아리의 중간 상태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분명, 병아리보다는 큰데 그렇다고 닭까지는 아니다. 삶에 대한 에너지는 무한대로 넘치는데 자신이 누구인지 여전히 정립하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다. 거기에다가 울타리를 벗어나야 하는 날은 점점 다가온다. 당연히 위태롭고 변덕스러울 수밖에.


일상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다: <레이디 버드>는 동성애에 대해서 다뤘다. 분량도 짧고 단순 에피소드로 휘발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이 너무 많지만 이쯤에서 의의를 둔다. <우리의 20세기>는 보다 길게 여성 인권에 대해 다뤘다. 임신, 섹스에 있어서도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에 대해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분명한 건 두 영화 모두 대다수 상업 영화가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 일상의 목소리를 담아냈다는 거다.


자식이 자식의 역할이 처음이듯, 어머니도 어머니의 역할이 처음아닌가. 어른에게도 세상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주인공과 어머니의 유대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레이디 버드> 속 아버지는 조연의 역할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20세기>에서는 아버지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어머니의 유대관계는 더 강화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어머니는 주인공을 마음 깊이 사랑하지만 다가가는 법은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시시콜콜 마찰을 빚어내고는 한다. 그 와중에도 서로는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일종의 넌센스다.


우리는 언제나 서투르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영화 속에서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한다. 짝사랑, 실연, 졸업파티. 난생처음 겪어보는 것들에 주인공은 마냥 서툴기만 하다. 실수투성이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비단,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인공의 가족, 친구, 선생님 역시 경험하지 못한 미래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투를 수밖에 없다. 두 작품은 우리 모두가 겪는 서투름의 감정을 표현한다.


<레이디 버드>의 메시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 줄 수는 없는 거야?"


 레이디 버드의 본명은 크리스틴이다. '레이디 버드'는 스스로가 자신에게 붙여 준 이름이다. 그러나 영화 어느 곳에서도 레이디 버드가 왜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작품의 주제의식과 관련된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했고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했다.


타인이 정해주는 삶에 머무르지 말고 진짜 '나'를 찾을 것


 레이디 버드가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만큼 이상한 게 어딨냐고 물어보는 씬이 있다. 레이디 버드에게 '크리스틴'은 부모에 의해 명명된, 사회에서 자신을 지칭하는 유일한 단어다. 하지만 그게 어째서 레이디 버드가 돼야 하는 거지? 레이디 버드에게 '크리스틴'은 진짜 자신이 아니다. 그건 부모가,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이름의 명명에 대한 합리성 여부를 벗어나 그 자체로 작은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이 지어지는 것은 타인에 의해 수행되는 행위다. 이는 자신의 자발적 행위 영역의 밖인 데다가 한 번 정해지면 통념상 바꾸기가 어렵다. 그렇게 평생을 타인의 행위의 결과로 불려지며 살아간다. 사실 우리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회의 기준에, 기대에 부응해서 사는 것이 안정적이고 좋은 삶으로 불려지는 요즘이다. 라캉이 말했듯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행위의 주체가 본질적으로 '나'자신이 아닌데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레이디 버드가 스스로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설정은 결코 간과할만한 무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 하듯 레이디 버드는 부모와 선생님의 요구에 끊임없이 반항한다. 레이디 버드는 (마지막 씬을 제외하고) 진정한 나 스스로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고군분투한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구태여 타인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다


 핵심적인 질문. 감독은 왜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을까. 간단하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은 그 자체로 타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는 한다. 레비나스(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는 우리가 '타자의 타자성'을 무시하고 타자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히 자신의 인식 체계 안에서 재정의함으로써 타인의 정체성을 왜곡시킨다고 비판한 바 있다.       

 '나'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내 생각, 행동이 빚어낸 세상 유일한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나만이 이해할 수 있고, 나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은 타인에게 굳이 알릴 필요도 없고, 혹여 타인이 알려달라고 해도 알려줄 의무는 없는 것이다. 애초에 알려준다고 해도 타인은 가치관의 장벽 때문에 온전히 나를 이해할 수 조차 없다.


 나 자신으로서 살아가며 타인과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타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부과시키고 '나'는 타인의 욕망으로부터 나의 욕망을 지켜야만 한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작은 투쟁이 아닐까 싶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레이디 버드와 그녀의 어머니가 대화를 하는 씬이 있다.


어머니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레이디 버드.
"엄마가 나를 좀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사랑하는 거 알잖아"
"그니까 좋아하냐고"
"난 항상 네가 최고의 모습이면 좋겠어"
"이게 내 최고의 순간이면?"

 

 레이디 버드는 지금 이 순간 자신으로 살며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타인의 영역에 존재하는 어머니는 그 모습이 자신의 욕망과는 다른 모습이어서 영 엉마땅하다. 타인을 자신만의 정형화된 인식체계에 끼워 넣으려고 시도하는 순간 모든 비극은 시작된다. 내가 그 자체로 나 자신이듯 타인도 그 자체로 타인 자신임을 인지하는 것. 타인에 대한 생각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새크라멘토. 왜 우리는 떠나야만 그 소중함을 알게 될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캘리포니아 주의 주도 새크라멘토. 레이디 버드는 하루빨리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에 있는 대학으로 떠나고만 싶다. 레이디 버드에게 새크라멘토는 권태로움과 지루함의 표상인 데다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재미'가 없다. 하루의 풍경은 계절만 바뀔 뿐 변함이 없고 학교에서의 삶은 지극히 단조롭다.

 경제적인 이유로 자신이 뉴욕에 가는 것을 막아야만 하는 어머니와의 마찰도 레이디 버드에게는 힘이 든다. 물론, 레이디 버드에게 가족은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지만 때로는 그 모든 것들이 그녀를 지치게 만들 때가 있다. 그러니까 레이디 버드에게 새크라멘토는 새 출발을 위해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지긋지긋한 곳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영화의 후반부까지는.

 우여곡절 끝에 뉴욕으로 떠나게 되는 레이디 버드. 그리고 뉴욕에서의 첫 번째 파티. 레이디 버드는 그곳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넌 어디에 살아?"
(웅얼거리는 목소리로)"새크라멘토"
"뭐라고?"
"아, 샌프란시스코"
"이름은?"
(잠시 망설이다가) "크리스틴"

 

 자신의 고향 그리고 그렇게까지 고집했던 자신의 '진짜'이름마저 거짓으로 말하는 레이디 버드. 새크라멘토를 떠나온 지금, 그녀에게 '새크라멘토'와 '레이디 버드'는 지우고 싶은 얼룩에 지나지 않는 걸까. 그렇게 술에 진탕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 도로에는 새크라멘토에는 없는 생기와 다양함이 넘치지만 레이디 버드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무채색의 레이디 버드는 도로변에 있는 성당을 보자 반대 극에 끌리는 자석처럼 그곳에 들어간다.

 

그토록 꿈꿔왔던 뉴욕에서의 삶. 하지만 왠지 모를 헛헛함이 밀려오는 레이디 버드. 


 새크라멘토에서 신학교를 다녔던 레이디 버드는 그렇게 성당을 지루해했음에도 가서 무심코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지켜본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내레이션과 회상 씬. 엄마도 새크라멘토의 그 도로가 그렇게 예쁜 줄 알고 있었어? 레이디 버드는 새크라멘토를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다. 나는 이 대사를 들으면서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가 그렇다.

 

 어쩌면 살면서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순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싶다. 순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면 내가 있는 그곳이 언제든 나에게는 천국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항상 '이 순간'을 놓치고 만다. 항상 뭔가 부족하고, 지루하고, 의미 없다고 느껴지고는 한다. 그러다가 그 순간을,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그 순간이, 그곳이 예쁘고 사랑스러웠음을 뒤늦게 깨달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대사를 곱씹을 틈도 없이 감독은 곧바로 영화의 문을 닫는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이런 류의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적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낸 시점부터 이것이 해소되는 결말까지의 과정에 꽤나 많은 공을 들인다. 주인공이 성장통을 겪고 성장하는 엔딩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도 한 차례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강렬하고 자세할수록 관객이 받는 감정적 여운은 더 깊어진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다르다. 레이디 버드가 여전히 성장통을 겪고 있는 상태에서 끝이 났다. 레이디 버드의 성장은 관객의 기억과 결합해 관객의 몫이 된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내 청소년 시절, 항상 똑같은 풍경이 지루하기만 했던 고향, 항상 같은 말만 하는 친구와 가족들. 돌이켜 보면 시간은 너무 빨리 흘러갔고 그 속에서 나는 떠나왔지만 떠나지 못했고, 미워했지만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우리 인생을 위해

 

 어떻게 생각해보면 참 기특한 영화다. 마냥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는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서랍에 쑤셔 넣은 기억들을 끄집어내 개어놓게 만들어줬다. 툭툭 던지는 대사에 무심코 흘긴 눈빛에 생각보다 많은 메시지들이 있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신파에 기대지 않고 스토리를 이끌어나갔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아닐까.

 영화를 보다 보면 사운드트랙이 좋은 것을 떠나서 유독 낯익은데 아니나 다를까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에서 음악 감독을 맡은 존 브라이언의 작품이다. 그레타 거윅의 센스에 경의를 표한다.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서의 데뷔작인데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배우이자 감독이다. 자극적이지 않은 소소한 재미와 문득 생각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레이디 버드>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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