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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ie Street Sep 28. 2018

길었던 추석 연휴 <B급 며느리>가 남기고 간 것들

 그러나 영화조차도 가부장제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제목: B급 며느리(2018.01.17)

감독: 선호빈

출연: 선호빈(본인 役), 김진영(본인 役), 조경숙(본인 役)

#1시간 20분 #가부장제 #추석 #며느리 #명절 #답답해 #비혼 하세요 #고부갈등 


<B급 며느리>는 주부 김진영 씨의 이야기지만 누구의 이야기라도 될 수 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리얼 다큐와 페이크 다큐 언저리에 위치한 <B급 며느리>는 고부갈등을 겪고 있는 주부 김진영 씨의 삶을 밀착해서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결혼을 함으로써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그뿐이다. 집안일에 참여하지도 감독이라는 직업도 포기하지 않은 채, 아내 김진영 씨와 어머니 조경숙 씨의 갈등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바라보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선호빈 씨의 시선에는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다. 

 김진영 씨는 대학생 때 사법고시 1차를 합격했다. 인생에 대한 방향도 그에 대한 재능도 확실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혼 전'이야기였다. 이제 김진영 씨가 해야 하는 일은 천 원짜리를 걱정하며 장을 보고, 아이를 돌보고, 남편의 밥상을 차리는 것이다. 김진영 씨가 하는 일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김진영 씨만 해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소한 일들 앞에 옹졸해지고 구질구질해지는 김진영 씨의 병들어가는 마음을 선호빈 씨는 (적어도 작품 상에서는) 보지 않는다. 

  

결혼 생활에 뛰어들기 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건강했던 사람이었는지...
그냥 그게 너무 나는 막 억울하고 지금 내 보습이 너무너무 비참해 나는 정말


 선호빈 씨가 갖는 감독으로서의 커리어와 집안에서의 편안함은 대가 없는 김진영 씨의 가사노동으로 지탱된다. 선택의 여지도, 대가도 존재하지 않는 가사노동이 계속되는 동안 김진영 씨의 말마따나 그녀는 병들고 늙어간다. 극 중 선호빈 씨가 작품을 찍고, 영화 지원 사업에 선정되는 등 자신의 꿈을 향해 활발히 나아가고 있는 동안 말이다. 김진영 씨와 선호빈 씨의 삶의 간극이 이렇게 점차 깊어지는데 정작 작품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김진영 씨의 인터뷰를 통해 짧게 강조되는 것이 전부다.


김진영 씨의 포기로 선호빈 씨의 삶은 보장된다. 그러면 김진영 씨의 삶은?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계속해서 비치는 것은 김진영 씨가 처한 일련의 비극뿐이다. 시어머니 조경숙 씨는 김진영 씨가 최소한 가족 대소사에는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열거된 대소사가 결코 적지 않다. 김진영 씨에게 대소사는 가족들과의 행복한 시간이 아닌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다과를 내오는 일의 연속일 뿐이다. 집안의 남자들이 TV를 보고 담소를 나누는 동안에 말이다. 김진영 씨가 극 중에서 말했듯 손 발 다 움직일 수 있는 어른 넷이 모였는데 시어머니와 그녀만 일을 하다가 분에 못 이겨 다투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처럼 김진영 씨는 결혼과 동시에 '부조리한 당연함'과 마주한다. 시동생에 대한 존댓말을 강요받는 상황 역시 그렇다. 대조적으로 신랑은 처제에 대한 존댓말을 강요받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늘 비참하다. 추석 전에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진영이는 안 갈 거예요!'라고 말해준 덕분에 시댁에 가지 않고 완벽한 추석을 보냈다는 김진영 씨의 인터뷰는 쓰라린 웃음을 짓게 한다. 김진영 씨라고 명절이나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그 마음은 선호빈 씨는 포기하지 않은 것이고 , 김진영 씨는 포기한 것이다. 

 시어머니 조경숙 씨에게 이러한 류의 대립법은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예외를 고려해본 적조차 없다. 그런 조경숙 씨에게 김진영 씨의 '시댁 왕래 포기 선언'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일 수밖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 김진영 씨는 'B급 며느리'가 된다. 아니, 조경숙 씨에 의하면 B급도 못 되는 F급 며느리다. 그러나 선호빈 씨는 발생하는 일련의 고부갈등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자신은 가사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두 사람의 갈등을 '기싸움'정도로 치부한다.


싫은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김진영 씨와 달리, 선호빈 씨는 가사에 가끔 참여하는 것만으로 좋은 아빠가 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선호빈 씨는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가사노동을 여자만 감당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선호빈 씨뿐만 아니라 그의 남동생, 그의 아버지, 그의 고모들도 '고부갈등에서 남자가 중재를 잘 해야 한다'는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극 중에서 그 누구도 남자도 가사노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가사노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정작 가사노동에 대한 가장 큰 수혜를 받는 사람에게 '가사노동에서 발생한 불화를 중재할 역할'을 부여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다. 그것은 다른 형태의 권력이고  누군가에게는 착취다.

 김진영 씨가 영화 말미에 말하듯 그녀와 시어머니의 갈등은 그들의 시기나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굉장히 복잡한 역학관계의 결과이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의 관계, 시아버지와 남편의 관계, 자신과 부모님의 관계가 얽혀있다. 고부갈등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남편에 의한 중재만 말한다는 것은 고부갈등의 재생산을 방관하는 셈이다. 그렇게 해결될 일이 아니다. 고부갈등은 잘못된 성 역할 고정관념과 이에 대한 관습화의 산물이다. 

 그 비뚤어진 관습은 김진영 씨가 말한 수많은 관계 속에서 대물림되고, 강요되며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 유지돼왔다. 그러나 <B급 며느리>에는 이와 같은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배제돼 있다. 선호빈 감독은 며느리들의 애한을 진정성 있게 다룬다고 했지만 결국은 남성중심주의적 사고방식에 입각한 자기변명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영화의 끝, 김진영 씨는 일종의 화해의 제스처로서 시댁을 다시 찾는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 설명란에 선호빈 감독이 기입했듯 그는 자신이 여전히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피해자)라고 믿는다. 

  

김진영 씨와 조경숙 씨의 갈등을 바라보는 선호빈 씨의 시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정식 작품은 오프닝 전에 '모방위험'이나 '대사'따위에 대한 위험도 측정표가 나오지 않나. <B급 며느리>의 모방위험은 '보통'으로 표기돼있으나 영화를 보며 '위험'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데 확신을 굳혔다. 작품을 관통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시선을 그대로 답습할까 우려가 될 지경. <B급 며느리>를 보며 놓지 말아야 할 것은 누가 며느리에게 B급이라는 등급을 부여하고 또, 애당초 누가 며느리들에게 가사 착취를 강요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반성이다. 유난히 길었던 추석 연휴, <B급 며느리>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정식 연재: http://www.lunarglobalstar.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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