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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Jun 10. 2019

수천만 원 행사 뒤편에는 이천 원 시급이 있다

이 이야기는 미담이자 괴담이다


* 이 일화는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다. 현재는 상황이 개선되었기를 바라며 글을 쓴다. 



방송작가로 전직하고 나서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았다. 페이가 적었기 때문에 부수입이 필요했다. 불러주면 뭐든 다 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한 선배가 내게 행사 작가로 참여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일단 이 일로 '물꼬'를 트면, 앞으로도 행사를 맡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단돈 얼마가 아쉬웠던 나는 선배의 제안이 정말이지 고마웠다.


선배는 행사 작가로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대략적으로 알려주었다. 이미 이 행사를 진행해보았던 메인 작가 선배가 있고, 나는 막내(또는 서브) 포지션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었다. 통 원고는 메인 선배가 쓰고, 나는 그 외의 짧은 코너 구성과 퀴즈 출제, 코너 음악 선곡, 섭외 대상 체크, 당일 행사 진행 도우미 등등의 업무를 수행하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 이 선배가 이야기를 마친 모양새다. 나는 아직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는데 말이다. 결국 내 입으로 먼저 물었다.



"선배, 그럼 제 페이는 얼마예요?"


"어... 이번엔 예산이 넉넉하지를 못해서 5만 원이야."



처음에는 잘 못 들었나 했다. 재차 물었더니 5만 원이 맞단다.



"선배... 이건 너무... 심한데요...?"


"이번에 행사가 급하게 잡혀서 그래. 다음부터는 좀 더 신경 쓸게. 이해해주라."


"아니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저는 이 돈 받고 할 수가... 하기가 어렵겠는데요..."



그러자 선배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너는 지금 일을 배워야 하는 애가 그런 얘기부터 하면 어떡하냐."


"일을 배워가며 한다고 제 몫을 해내지 않는 건 아니잖아요. 선배 이거 시급으로 한 번 나눠보세요. 저 시간당 이천 원이나 될까 싶어요. 이건... 열정 페이잖아요."





행사를 하나 치르려면 원고만 써서 될 일이 아니다. 섭외, 코너, BGM, 사전 답사, 행사 진행, 주차 안내, 하다못해 행사 마친 뒤 쓰레기 정리까지.... 전방위로 뛰어야 했다. 내가 이 행사에 들이는 시간 총량 대비 페이를 계산해보니 답이 없었다. 시간당 2000원이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불과 며칠 전 원고에 '열정 페이' 이야기를 썼는데, 웬걸 내가 바로 당사자였던 것이다.


당시는 '열정 페이'라는 단어가 한창 사회적 화두가 되던 시기였다. 내 말을 들은 선배는 말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 노동력이 이렇게까지 저평가되어야 할까 싶어 그저 심란했다. 금요일, 퇴근 직전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불금'을 망치고 말았다.






내심 생각했다. 선배가 '행사는 없었던 일로 하자'라고 말할지도 모른다고. 열정 페이 운운하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작가는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그렇게 월요일이 오고, 아니나 다를까 그 선배가 내 자리로 다가왔다. 그런데 '열정 페이 사태'가 있던 금요일과는 얼굴이 다르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이 작가, 나 칭찬해주라."


"왜요?"


"여기저기 얘기 잘해서 페이 10만 원으로 올렸다? 나 고생했어."


"정말요?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해요!"





선배는 내 입에서 나온 '열정 페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고민 끝에 번거로운 일을 자처했다. '여기저기 얘기 잘했다'는 한 문장에 내포되었을 긴 과정이 떠올랐다. 선배는 직속 상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을 것이다. 작가 페이에 문제가 있음을 알렸을 것이다. 상사의 동의를 구하고, 어쩌면 서류도 한 두장 다시 썼을지도 모른다. 선배는 이 귀찮은 과정을 거쳐 결국은 작가 페이를 상향 조정해냈다. 그리고 이 성과를 내게 알리러 온 것이다.


시급으로 따지면 2000원이 4000원이 된 셈이다. 어차피 둘 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선배와 함께 대박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문제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아가 행동해 주는 선배가 어디 흔하던가. 그 고마움을 마음에 품고 행사를 치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미담이자 괴담이다. 문제의식을 공유해준 선배가 있어 미담이고, 수십 년간 막내작가 행사 페이에 변동이 없었다는 점에서 괴담이다.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이 왔다 갔다 하는 행사에서 작가, 특히 막내작가의 페이는 암담한 수준이다. 심지어 교통수단 지원이 안되면 행사를 하는데 잔고는 마이너스가 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이젠 이 '괴담'을 멈출 때도 된 것 아닐까. 행사를 하면서 집을 마련했다는 연예인들까지는 아니어도, 작가가 행사에 들인 공력 정도는 인정받았으면 한다. 하다못해 행사 스태프들이 먹을 김밥 값도 매해 오르는데 물가상승률도 막내 작가 페이는 피해 간다. 부디 2019년의 '막내'들은 최저시급 수준의 페이라도 보장받기를, 행사 이후 헛헛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지 않기를 2014년의 막내가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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