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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Nov 08. 2019

오늘 밤에도 비정규직의 이름이 TV에 스치운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한 편의 방송국 프로그램이 제작되기까지 몇 명의 비정규직이 필요할까. 문득 궁금해졌다. 프로그램으로 설정하면 범위가 너무 커지고 오류가 클 것 같아서 작게 코너 하나로 계산해봤다. 서울에 위치한 모 방송국을 예로 들었고 프로그램 성격은 시사로 설정했다. 


먼저 프리랜서인 작가와 정규직 피디가 아이템 회의를 한다. 

촬영 아이템이 선정되면 사전조사와 장소, 인물 섭외를 진행한다. 

현장 촬영 당일 방송사 차량에 오른다. 

운전석에는 파견 비정규직 운전노동자가 앉고, 

나머지 좌석에는 정규직 피디, 프리랜서 작가, 비정규직 촬영기자가 동행한다. 

(비정규직 운전노동자가 없는 경우에는 비정규직 촬영기자가 운전 노동을 하기도 한다)

촬영물은 프리랜서 작가의 프리뷰, 정규직 피디의 편집을 거쳐 

비정규직 CG실 직원의 손과 비정규직 AD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다. 


방송국 속 비정규직 찾기 놀이


정규직은 피디 1명뿐이다. 나머지 6명 전부가 비정규직이거나 프리랜서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같은 특수한 상황은 집어넣지도 않았다. 심지어 코너 하나가 이 정도라면 프로그램 한 회를 제작하는데 투입되는 비정규직의 숫자는 눈덩이처럼 커진다.


물론 내가 설정한 모 방송사보다 상황이 더 나은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촬영기자나 CG실 직원이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아예 코너 자체를 통으로 외주화 한다거나, 피디나 진행자도 비정규직, 프리랜서로만 구성되는 프로그램도 많다. 예시로 든 곳은 서울에서도 처우가 괜찮기로 알려진 방송사다.

노동권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사진-기생충 공식 포스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방송계 비정규직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핫’하다. 제작 스태프들과 표준 근로계약서를 작성해 근로 시간을 준수하며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방송사들은 봉준호 감독과 근로계약서라는 키워드를 기사와 영상으로 제작해 국민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 방송사에서 제작되는 드라마 현장에서도 비정규직들과 근무 시간을 보장받는 표준 근로계약이 체결됐을까? 꿈같은 얘기다. 근로 시간 준수는 고사하고 하루 18시간 일한다는 드라마 스태프의 증언이 속출했다. 이들은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다”고 외친다. 한 방송사 안에서 누구는 봉준호 감독의 표준 근로계약 체결을 칭송하고 누구는 비정규직으로 18시간 일하다 코피를 쏟는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하나. 


소수의 정규직과 다수의 비정규직, 상근 하는 프리랜서가 방송을 만든다. 방송가에서는 흔하디 흔한 모습이다. 하지만 익숙한 모습이 곧 옳은 모습은 아니다. 혹자는 방송의 외주화로 인해 전반적인 노동환경이 열악해졌기에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의 장시간 노동, 낮은 임금, 불안정한 고용이 불가피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장시간 근로하는 비정규직,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프리랜서, 편법적인 턴키 도급계약이 가장 흔한 곳이 방송계다. 그런데 한 회사 안에 1억 원 이상 연봉자가 51.9%를 차지하는 것도 방송계다. (이 근거자료는 놀랍게도 KBS에서 나온 것인데, 2019년 9월 15일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실에서 내놓은 ‘KBS 전체 직원 중 60.8%가 지난해 연봉 1억 원 이상을 받았다’는 보도자료에 대한 해명자료였다. 실제로는 51.9%였다고.)


윤상직 의원님 60% 아니라는데요. 사진-윤상직 의원 블로그


‘관행’이라는 미명으로 그간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스태프들이 최저임금도 안 되는 급여를 받았나. 기형적인 임금구조는 누가 만들었나. 사람을 ‘갈아서’ 프로그램을 만들고 상을 받은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쌓여가는 질문들이 모여 결국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됐다. 방송 작가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에, 방송 스태프들은 희망연대에 둥지를 틀었다. 노동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갖기 위해서다. 이들이 주창하는 이야기에 거창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방송작가노조는 ‘막내작가 최저임금 주기 운동’을 진행한다. 상당히 이상한 운동 아닌가. 막내작가는 섭외부터 취재, 원고, 큐카드 작성, 심지어 주차관리까지 온갖 잡일을 다 맡는다. 그런데 받는 돈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노조에서 최저임금 좀 주자며 운동에 나선 것이다. 



노동상담도 진행하고 있다. "떼인 임금 받아드립니다!"  사진-방송작가유니온


그런가 하면 스태프 노조는 “하루 8 시간 수면권을 보장하라”고 외친다. 얼마나 심각하기에? 방송 스태프 지부 자체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드라마 현장의 스태프는 하루 평균 20.4시간을 일했다. 올해는 18시간으로 나타났다. 살인적인 노동강도다. 수면권 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스태프뿐만 아니라 연기자, 피디를 위해서도 빠른 개선이 절실하다. 


프로그램 한 회를 만드는데 상상 이상의 비정규직이 투입되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프리랜서라서 계약 없이 일하고, 스태프라서 급여 대신 상품권을 받는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연예인 뒤에는 최저임금도 못 받는 막내작가가 있다. 사회 정의를 외치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영상 촬영자 이름은 2년마다 바뀐다. 비정규직이기 때문이다. 


나는 방송을 꿈꾸던 이들, 열정으로 버티던 이들이 더 이상 다치고, 병드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사람을 갈아 넣는 방송은 없느니만 못하다. 그나마 최근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방송 스태프도 근로계약서를 쓰는 일이 생겼고, 포항 MBC에서는 작가들과 협의해 해고예고수당에 준하는 보호장치를 마련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으로 각 노조가 찬바람 맞아가며 이룬 성과다. 이제는 ‘위’에서도 답할 차례다. 


오늘 밤에도 TV 프로그램 스크롤에 수많은 비정규직의 이름이 스치운다. 이들이 오늘은 부디 밤샘을 하지 않기를. 해야만 한다면 그 노동 시간에 준하는 급여를 받을 수 있기를. 하다못해 노조에라도 들었기를 빌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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