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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Nov 11. 2019

놀랍도록 창의적인 '변종 계약서'

계약하자고 했지 노예 계약이라고는 안 했는데요

화장품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 아무리 비슷한 색감과 발색을 가진 화장품이라고 해도 완벽히 같을 수는 없다는 문장이다. 이 말이 방송 업계에서는 이렇게 치환된다. ‘하늘 아래 같은 만행은 없다’


지난 2017년 겨울, 처음으로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라는 게 마련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방송작가, 방송사, 제작사 등과 1년이 넘는 협의를 거쳐 만든 포맷이다. 소식을 접한 프리랜서 방송작가들은 기뻐했다. 종이 한 장 없이 구두로 채용되고 하루아침에 잘리던 나날들이여 이제는 안녕.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방송계 프리랜서들의 숨통이 좀 트였을까? 쉽게 ‘그렇다’고 하기 어렵다. 하늘 아래 같은 만행은 없다더니, 계약서가 없어 태연자약하게 이뤄지던 일들이 계약서 아래서 섬세하고 교묘하게 이뤄졌다. 계약서가 개‘악’서가 되어버렸다. 계약서 도입 전과 후를 ‘김보통 작가’의 예로 비교해본다.



표준계약서 도입 전과 후, 김보통 작가의 삶을 araboza


표준계약서 도입 전, 김보통 작가는 모 프로그램의 모집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했다. 공고에는 급여가 명시되지 않았다. 다만 ‘상근’이라는 글자는 명확하게 보였다. 면접 이후 합격 연락이 왔다. 김보통 작가는 첫 출근을 하고 나서야 급여와 근무시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계약기간을 묻자 ‘그런 것 없이 쭉 일할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심하고 상근 근무에 들어갔지만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김보통 작가는 당일 해고 통보를 받았다. 계약서를 쓰지 않았으니 계약해지가 아니라는 관리자의 말이 비수가 되어 김보통 작가의 가슴에 꽂혔다.


표준계약서 도입 후, 김보통 작가는 모 프로그램의 모집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제출했다. 면접 이후 합격 연락이 왔다. 김보통 작가는 방송사와 계약서를 썼다. 그런데 문체부 권고 표준계약서와는 내용이 좀 달랐다. 계약기간은 1년 단위로 연장되는 형태였지만 ‘계약기간 종료 전이라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이 들어있었다. 김보통 작가는 찜찜했지만 꼭 일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이기에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리고 1년이 되기도 전에 해고 통보를 받았다. 계약 기간이 남았지만 단서조항이 있어 해고가 불법이 아니라는 관리자의 말이 비수가 되어 김보통 작가의 가슴에 사납게 꽂혔다.



계약서 써요 말아요? 혼란하다 혼란해


계약서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이 더 나쁠까, 아니면 독소조항이 가득한 계약서를 쓰는 것이 더 나쁠까. 나는 그래도 계약서가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다. 계약서는 방송계 프리랜서들에게 에어백과도 같다. 그나마 1년 단위의 고용안정도 계약서가 생기기 전에는 없던 일이다. 계약서 도입 전만 해도 그저 프로그램 책임자의 말 한마디가 작가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했었다.


방송계 프리랜서들은 선의나 믿음, 함께 보낸 시간에 따른 신뢰... 그런 형태 없는 것들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내게 신뢰를 가진 피디가 프로그램을 떠난다? 내 신뢰는 다시 0이 되었다. 생사여탈권을 쥔 사람에게 어떤 문제제기를 할 수가 있을까.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시키는 일만 해서, 불편한 소리를 해서... 이런 이유로 작가가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생겼다. 작가들은 점차 목소리를 잃었다.


그런 업계 환경에서 표준계약서라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하루아침에 길에 내쳐지지 않겠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런데 ‘언제든 상황에 따라 계약기간 전에도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니... 이런 내용의 조항은 기껏 마련한 에어백에 구멍을 내는 꼴이다. 구멍 뚫린 에어백은 아무 기능도 없다. 그저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


피해사례도 놀랍도록 다채롭다. 방송작가유니온이 지난해 12월 26일 공개한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 도입 1주년 토론 자료집>에 따르면 A 방송사는 6개월 단위로 고용기간을 한정하더니 급기야 1개월, 3개월짜리 계약서를 만들었다. B 방송사는 계약서 안 계약 해지 조항에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이라는 문구를 넣으려다 노조의 교섭으로 독소조항을 수정했다. 참으로 창의적인 계약서 변형 사례다.



문체부 : 표준계약서 쓰라고!!                                                              방송사 : 아 계약서 고칠거라고!!!


일련의 사례를 보며 느낀다. 하늘 아래 같은 만행은 없다. 만행도 진화한다. 정부가 방송 집필 표준계약서를 만들면 사측은 계약서 내용을 고치며 변화를 막는다. 창과 방패를 보는 것 같다. 계약서 도입 이후에도 작가 처우는 도긴개긴이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서도 작가들은 무력감에 침잠하지 않는다. 다소 두렵긴 하지만 땅 위에 두 발 단단하게 딛고 서 있는다. 다음 고난은 무엇일지 궁금해하면서 이들도 다음 스텝을 준비한다. 방송계의 공고한 관행만큼이나 수십 년간 방송국 안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작가들의 맷집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업계의 스산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나는 내가 일하던 공간과 업무를 정말 좋아했다. 심보선 시인이 고백한 것처럼 나 역시 ‘끝까지 신랄할 수 없는 사람이며, 사실은 희망하기 위해 비관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더 쓰고자 했다. 방송이 절대 다루지 않는 방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고 당장 바뀌는 건 없겠지만 그래도 쓴다. 이 글을 읽고 한 명의 프리랜서라도 불공정한 계약서를 걸러내게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계약서를 쓰랬더니 노예계약서를 쓰고 오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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