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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Oct 16. 2019

방송작가 A 씨, 제가 감히 응원해도 될까요

기사 속 그녀가 곧 나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일하던 습관이 남아있어 뉴스를 자주 체크하는 편이다. 며칠 전 별생각 없이 기사 하나를 클릭했다. MBC가 프리랜서 작가와 독소조항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아니 여기마저...’ 씁쓸해하며 기사를 눈으로 훑는데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한다. 손끝이 차갑다 못해 저려온다. 기사 속에 또 다른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와 방송작가유니온의 성명을 통해 파악한 내용은 이렇다. MBC 시사외전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일하던 A 작가. 그날도 평범하게 아침 회의에 참석했다. 못 보던 사람이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별다른 언질 없이 회의가 끝났다. 회의 이후 팀장이 “A 작가님은 저랑 말씀 나누시죠”라는 말을 던졌다. A 작가는 구두로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회의에 참석한 낯선 이는 대체작가였던 것이다. 심지어 연말까지 기간이 명시된 계약서까지 존재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계약서에 독소조항이 있었다. 


사측은 항의하는 A 작가에게 7일, 혹은 4주의 유예시간을 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대체작가까지 뽑혀있는 마당에 둘이 함께 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A 작가는 통보 다음 날까지 일했다. 그리고 현재, 해당 방송국 앞에서 A 작가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웃다가도 착잡하고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남 일'인데도.



기사를 보고 내내 마음이 어지러웠다. TV를 볼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그 이야기를 완전히 잊지 못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웃긴 짤방을 보며 낄낄대다가도 순식간에 음울해졌다. 자려고 누우면 갑자기 심장이 방망이질하듯 뛰었다. 며칠 째 통잠을 못 자고 한두 시간마다 계속 깨는 바람에 다크서클의 문신화가 진행되고 있다. 마음이 축나면 몸도 따라서 축난다. 결국 나는 쓰려던 다른 글감을 치워두고 이 이야기를 쓴다. 쓰지 않으면 기어이 어딘가 아프고 말 것 같아서다. 



그녀의 이야기, 곧 모두의 이야기


내가 알지도 못하는 방송작가의 해고에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는 사사로운 이유가 있다. 앞서 내가 그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작가님, 오늘 방송 수고하셨고 다음 주 까지만 나오세요 참조) 그 일을 겪으면서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타인에게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배웠다. 내가 잘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잠까지 설쳐가며 (쓸데없이) 깊이 공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계약 만료 통보를 받던 당시 순식간에 4kg이 빠졌다. 하루아침에 나가라는 통보를 받다니, 내가 능력 없고 초라한 작가임을 공인받는 것 같아서 숨기고 싶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며 물었다. 나는 “별일 아니고...”로 입을 열어 결국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고 목이 멘 채로 입을 닫았다. 별일 아닌 척했지만 별일이라는 것을, 올해 최악의 일이라는 것을 끝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지금은 지인들에게 그 날 이야기를 해야 할 때 목소리를 떨지도 않고, 그 이야기를 소재로 농담을 하기도 한다. (살도 다시 쪘다...) 해고 스토리를 기점으로 내 삶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되돌아보면 치유의 시작은 그날의 일을 글로 회고하는데서부터였다. 그 전에도 누가 괜찮냐고 물으면 짐짓 “당연하지!”라고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글로 풀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괜찮아졌다. 



치유에 몰두한 나, 연대하고 투쟁하는 그녀


A 작가는 나보다 더 괜찮을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통한 치유에 몰두했다면 그녀는 연대와 투쟁을 선택했다. 주저앉아 울지 않고 광장에 나왔다. 나와 한 문장에 넣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찬연한 행보다. 



방송작가유니온을 통해 공개된 뉴스외전 패널 김방희 생활경제연구소장의 손글씨 지지문



그녀와 한 프로그램에서 일하던 동료 작가는 집필을 보이콧했다. 방송에 출연하던 한 패널은 출연 거부 입장을 밝혔다. 방송작가유니온은 그녀의 이야기를 성명으로 발표했다. ‘땅콩 회항’ 공익제보자 박창진 씨가 연대 시위에 나섰다. 바른미래당 박선숙 의원은 청문회를 통해 MBC가 프리랜서 계약서에 독소조항을 넣었다고 지적하고 A 작가 사례도 언급했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MBC 앞에서 1인 시위에 나섰다. 매일 한솥밥 먹던 사람들이 눈앞을 황급히 지나가는 동안 묵묵히 피켓을 들고 서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쓰면서 또 조금 치유된다. 적어도 A 작가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위로받는다.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작가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이 시대를 사는 많은 프리랜서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오늘도 제2, 제3의 A 작가가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갈 길이 구만리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있지만 A 작가의 사례도 아직 해결된 것이 없을뿐더러, 지금 구조에서는 얼마든지 제2, 제3의 A 작가가 나올 수 있다. 아니, 나오고 있다. 작가와 계약서를 쓰지 않는 한, 어렵게 계약서를 쓰더라도 독소 같은 조항을 은근슬쩍 끼워 넣는 한, 프리랜서를 사람이 아닌 갈아치울 부품으로 보는 한 이런 일은 반복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썼다. 이게 내 방식의 연대다. 일면식도 없는 A 작가에게 조심스레 묻고 싶다. 


“작가님, 제가 감히 응원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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