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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혜 Aug 27. 2021

이 잔을 다 마시고, 다음 계절로 가자

우울과 출간, 그리고 숙취 해소제

폭염보다 지독한 우울을 앓은 너에게 이 계절은 어떤 의미였을까.


내겐 이번 여름이 특별했어. 첫 책이 나왔거든. 올해 초 출간 계약을 하고 정신없이 달렸어. 매일 글을 쓰고 만지며 봄을 넘겨 여름을 맞았지. 그렇게 7월이 되고 책이 세상에 나왔어. 나는 홀가분한 얼굴로 뒤를 돌아봤어. 거기에 네가 있더라. 우는데 모든 기력을 다 써버린 얼굴로. 우울에 잠식된 일상을 간신히 버티면서.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네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밖에 없었어. 나랑 통화하면서 서럽게 울고 난 뒤 너는 정신과를 가겠다고 했어. 그 말을 들으니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이제야 말인데 나는 네가 정신과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 질질 끌고서라도 병원에 데려갈 생각이었어. 아무 일 없는 척 살기에는 네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거든.


매사 착실한 너는 내게 말한 다음 날부터 병원에 가고 약을 먹기 시작했어. 누구보다 성실하게 알약을 삼키고 일상을 견뎠지. 그렇게 시간이 제법 지나고 우린 오래간만에 만났어. 아이 엄마가 된 너를 온종일 잡고 있을 수는 없으니 대낮에 만나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기로 한 거야. 나는 미리 예약해둔 한적한 창가 자리에 앉았어. 고작 3분 먼저 도착해서 초록이 지천인 창밖을 보며 널 기다리는데 만감이 교차하더라. 내겐 그저 싱그러웠던 이 여름이 너는 얼마나 고단했을지.


(출처:unsplash)


정말이지 그 멀쩡한 한낮에 누가 툭 치면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더라니까. 상념에 잠겨 있는데 네가 식당으로 들어오더라. 나는 헛기침을 하고 너를 향해 손을 흔들었어. 그런데 네가 자리에 앉자마자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약봉지를 하나 꺼내서 내게 건넸어. 뭔가 싶어서 봤더니 연한 파란색 봉지에 큼직하게 ‘숙취해소’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거야. 아니, 저기요. 지금 오전 열한 시 사십 분이거든요?


난 어이가 없어서 막 웃었는데, 그러면서도 우리가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일로 웃음 지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여름 끝자락에 너와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태연한 얼굴로 식당에 앉아 웃을 수 있게 되기까지 네가 얼마나 징글징글한 시간을 보냈겠어. 죽고 싶다는 마음을 죽이느라 안간힘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네가 보냈을 계절을 가늠해보면 이 여름이 저무는 것도 나쁘지는 않더라.


그날 네가 준 숙취 해소제를 털어 넣은 뒤 마시는 맥주는 꿈같이 맛있었어. 확실히 술맛은 함께 마시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나 봐. 우리 이렇게 사소한 구원을 자꾸 만들자. 네가 아이 엄마이긴 하지만, 어쩌라고? 밤에 못 만나면 낮에 만나면 되고, 여행을 못 가면 동네 산책을 가면 되지. 그마저도 기력이 부치면 너네 집 거실 바닥에 누워서 흐르는 구름이나 보면 되는 거야. 가끔 시답잖은 얘기를 툭 던지고 낄낄대면서.


다시 조금씩 일상을 되찾은 걸, 글도 한 편씩 쓸 만큼 기운을 차린 걸 축하해. 기념으로 오늘 밤에는 맥주를 마실까? 너는 너희 집에서. 나는 우리 집에서. 원격으로 짠이라도 하는 거지. 그렇게 이 잔을 다 마시고, 다음 계절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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