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을 혐오하기로 했다-3

인류애의 진자운동

by 흑선백지

인간 때문에 고통받는 생명들은 얼마 없는 내 안의 인류애를 빠르게 찢어발겼다. 나는 점점 더 무표정해졌고 사람이 많은 곳을 피했다. 직립보행을 하고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도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길 한구석을 줄지어 가는 개미들과 우주의 역사에서 0.002% 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나는 남아 있던 미약한 인류애를 끌어내 마음 깊은 곳에 묻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애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지우려 해도 희미하게 남는 연필 자국처럼, 내 마음 어딘가엔 인류애가 남아 있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서로를 신뢰하고 협업하는 집단이 생존에 유리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는 당연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었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아무리 낮춰도, 그 아래엔 늘 또 다른 기대가 있었다. 나는 인간의 비도덕성에 실망할 때마다 기준을 낮췄지만, 그 아래엔 늘 ‘그래도 이 정도 선은 넘지 않겠지’라는 마지노선이 있었다. 나는 역사 속에 수많은 전쟁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인류애가 이미 바닥났다고 여겼다. 차가운 심장의 나는 지구 어딘가에 전쟁이 났다는 기사를 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 똑같은 전쟁도 없었다.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태의 잔인함은 언제나 존재했다. 인간의 창의성은 폭력에 있어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인간의 악행에 무감각해지는 경지란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인류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내가 인간 혐오에 빠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 인간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뒤섞인 상태였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내 마음에 상처를 남기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치유했다. 나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혐오하면서도 인정했다. 이는 인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위태로운 감정의 진자운동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연료가 되었다.


물론 이것으로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여정을 완주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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