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왕국은-2

by 흑선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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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면접에 지각한 날로부터 얼마 후에 2020년의 미국에는 여러 혼란이 닥쳤다. 코로나19로 3월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실업률이 폭등했다. 5월에는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이 백인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사망하면서 흑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는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했다. 9월에는 캘리포니아 대형 산불로 남한의 17.4%에 해당하는 면적이 소실되었다. 11월 대통령 선거에 조 바이든이 당선되었지만, 도널드 트럼프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정치적 분열이 심해졌다.


여러 사건 중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Black Lives Matter’(이하 BLM) 운동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BLM 티셔츠였다. 일부 참여자들은 가슴 중앙에 흰 글씨로 BLM이 인쇄된 검은 티셔츠를 입었는데 이 모습이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에 퍼졌다. BLM 티셔츠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정치적 발언 도구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운동을 지지하는 기업과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디자인의 티셔츠를 출시했고, 유명인들이 이를 입기 시작하면서 BLM 티셔츠의 판매량은 늘어났다. BLM 운동이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지자, 티셔츠를 팔아 수억 원을 번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수익금 일부 혹은 전액을 흑인 인권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다.


나는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숭고한 운동에서 천박하게도 내가 앞으로 먹고 살 방향에 대한 단서를 보았다. BLM 운동을 통해 미국인들이 오프라인에서 사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사실 미국에서는 이전에도 일상에서 기후 위기, 동물권, 성적소수자 등에 대한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튀는 행동이 아니었다. 이러한 표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상품도 많았다. 사회적인 메시지가 인쇄된 티셔츠, 컵, 그림 등이 팔리고 있었다. 특이했던 점은 개인이 이러한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업체가 많았다는 점이었다. 이를 Print on Demand(이하 POD)라고 하는데 간단히 말해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필요한 만큼만 인쇄’하는 방식이었다. 개인이라도 훌륭한 디자인만 있다면 POD 업체에 수수료를 내고 인쇄와 배송을 맡길 수 있었다. 즉 나는 방구석에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나의 제품을 팔 수 있었다.


POD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초기 비용과 재고에 대한 부담도 없어 제품이 팔리지 않아도 손해 볼 것이 없었다. 나는 나의 이상에 부합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은 것 같았다. 재고 때문에 막대한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패스트패션과 달리 주문받은 만큼만 제품을 만들기에 불필요한 오염을 줄일 수 있었으며 친환경적인 소재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나는 POD 플랫폼에서 판매되고 있는 경쟁사의 티셔츠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 디자인이 조잡했고 원색적인 메시지가 많아 일상에서 입기엔 부적합해 보였다. 기회가 보였다. 나는 잠시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천장을 보았다. 뇌는 하얀 벽지에 희망을 그리기 시작했다. 친환경적이면서도 사회적인 메시지가 담긴 세련된 티셔츠 브랜드. 제품이 팔릴 때마다 사회적 메시지가 퍼지고 수익금 일부는 기부된다. 시장도 확보되어 있었고 브랜드의 차별점도 있었으며 위험부담도 적었다. 시도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한동안 나의 머릿속은 앞으로 만들 이상향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동안의 마케팅 경험을 살려 누구를 고객으로 삼을지, 웹사이트는 어떻게 꾸밀지, 콘셉트는 무엇인지, 브랜드 이름과 로고 등을 구상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머릿속의 상상을 온라인 세계에서 구현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프루트랜즈의 두 이상주의자가 그랬듯 나의 영토를 구매하는 것이었다. 약 2만 원을 내고 브랜드명을 입력하면, 온라인 세계에서 1년 동안 쓸 도메인 주소를 얻을 수 있었다. 올컷과 레인처럼 도덕적이고도 독립적으로 생존하는 삶에 대한 열망을 담은 이름을 입력한 후 엔터를 눌렀다. 구매가 완료되었다는 화면이 떴다. 나의 왕국을 위한 주춧돌이 놓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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