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그럼에도'를 찾아서

by 흑선백지

번아웃과 우울증 경력자인 나에게도 지난 몇 주는 유독 힘들었다. '괜찮을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텼지만, 마이크 타이슨의 전성기 시절 주먹을 맞은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30년 넘게 쌓여온 묵은 감정들에 짓눌려 며칠 동안 밥을 안 먹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는 나의 머릿속은 '어차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도 사는 재미없고 괴로울 텐데.'

'어차피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텐데.'

'어차피 죽는데. 내가 사랑하던 외할머니는 93세에 몸이 쇠약해져 죽고 싶다 흐느끼셨는데.'

'어차피 지금 세상 돌아가는 꼴 보면 기후 위기로 다 죽을 텐데.'

'어차피 저출산으로 몇 년 후에 한국 망할 텐데.'


머릿속의 '어차피'라는 생각들은 그동안 내가 외면하려 했던 부정적인 미래를 정교하고 설득력 있게 펼쳐 보였다. ‘어차피’의 암울한 미래는 머릿속에 정밀화처럼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것을 바꿀 어떤 변수도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의 뇌는 한편으로 '그럼에도'를 찾으려 애썼다.


'그럼에도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를 생각하는 가족이 있다.'

'그럼에도 나의 미래는 고정되어있지 않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이런 '그럼에도'들은 그동안 내가 무너질 때마다 복용하는 치료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복용하는 바람에 내성이 생겨버렸다.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이유, 앞으로도 반복될 이 고통을 견뎌야 하는 이유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가 며칠 째 계속되자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스탠드를 켜고 책상 앞에 노트를 펴고 앉았다. 파란 잉크가 나오는 펜을 들어 왼쪽에는 내가 죽어야 할 이유를, 오른쪽에는 살아야 할 이유를 천천히 적었다. 양쪽의 익숙한 파란색 글씨들이 채워졌다. 같은 사람이 쓴 글씨였지만 오른쪽 글씨는 왼쪽에 비해 매가리가 없었다. 살아야 할 이유들은 억지스러웠고 볼품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들 앞에서 기를 못 폈다. 죽어야 할 이유들은 자연스러웠고 타당해 보였다.


왼쪽의 글씨들을 한 동안 보았다.

죽어야 하는 이유들에는 모두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공통점이 보였다. 즉 나는 결과 중심적인 인간인 것이다. 흔히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결과에 중점을 두는 사람이었다. 이미 결과가 암울한 걸로 정해졌으니 삶이라는 과정 자체가 무의미했다.


남아있는 한 줌의 기력을 짜내서 이 말이 타당한지 생각해 본다. 나의 무의식은 결과에 따라 과정은 정해진다. 결과가 하나로 정해지면 과정도 하나로 정해진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겪는 절대적인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이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어도 아직까진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든 인간은 죽음을 향한 무의미한 생의 과정에서 이탈해야 한다. 즉 자살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만의 경로를 통해 천천히 죽어가며 종착지에 도달한다. 직장을 다니거나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불운한 이들을 돕는 등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천천히 죽어간다. 나는 내가 미래에 죽는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그로 인해 지금 당장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즉 결론이 정해졌다고 해서 과정까지 정해질 필요는 없다.


또 생각해 본다. 내가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끝인가. 여러 직업의 여정에서 정상으로 여겨지는 지점이 있다. 셰프들에겐 미슐랭 3 스타가, 축구선수에겐 발롱도르가, 물리학자에겐 노벨상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에 도달하는 것을 삶의 종착역으로 삼지만 대부분 이에 도달하지 못한다. 도달하지 못하는 목표에 대한 환상은 더욱 커진다. 저것만 손에 넣으면 나의 인생이 완성될 것 같다. 반대로 저걸 손에 넣지 못한 나의 인생은 불완전한 것 같다.


노벨상의 저주란 것이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들을 연구한 결과 일부는 수상 전보다 연구 생산성이 감소하거나, 새로운 연구에 대한 동기를 잃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런 변화를 겪는 학자들은 은연중에 노벨상을 수상하는 것이 결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노벨상을 수상해도 연구할 것은 무궁무진하고 학자로서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잠시 망각했던 것은 아닐까? 모수의 안성재 셰프는 미슐랭스타 3 스타를 받았을 때 순간적으로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똑같이 메뉴를 구상하고 재료를 다듬고 레스토랑을 관리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발롱도르를 수상이 축구 선수로서의 생활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종 직업 분야에서 관찰되는 결과 후의 이어짐은 인생 전체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우리가 인생의 최종적인 결과라고 생각하는 죽음 후에는 또 다른 이어짐이 있는 거 아닐까? 종교에서는 극락, 천국, 윤회가 그것이다. 무신론자인 나는 나의 죽음 이후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나의 몸을 구성했던 원자 분자들은 토양, 공기, 물 등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체나 자연환경의 일부가 될 것이다. 혹은 다시 우주로 돌아가 먼 훗날 또 다른 별, 행성의 일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새벽에 무질서하게 떠오른 생각들은 이어져서 하나의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았다. 인생의 본질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내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결과들은 또 다른 무언가로 이어져 있었다. 어차피 내가 괴로운 삶을 살다 죽고 어차피 세상은 멸망한다고 하더라도 끝처럼 보이는 결과들은 그럼에도 또 다른 것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어쩌면 수많은 ‘어차피’ 속에서 새로운 ‘그럼에도’를 발견한 건지도 모르겠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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