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는 날. 마드리드 르 꼬르동 블루는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라는 대학(Universidad Francisco de Vitoria) 안에 위치하고 있다. 여름 방학이 한창이라 저렴하고 간단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도 문을 닫았고 샌드위치, 비스킷, 초콜릿, 탄산음료를 파는 자판기도 금방 떨어져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때가 많다. 제과 공부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살이 많이 쪘기에 한 끼 정도는 굶어도 되지 뭐 하며 빈손으로 학교에 갔다가 후회하기 일쑤. 주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까 불안하기도 하고, 굶고 부엌일 (aka 학교 실습)을 하니 세상에나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체력까지 바닥을 보이는 느낌.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먹을 것을 좀 챙겨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나의 학교 가는 길. 바로 가려고 준비도 다 하고 나왔는데, 아니다. 집에 들러야겠다. 마침 레시피북도 안 가지고 나왔으니 이건 집으로 가라는 신의 계시다.
텀블러에 커피부터 쌌다. 벌써 2.5유로를 아낀 셈이다. 냉장고를 살펴보니 어제 남은 볼로네제 파스타 소스가 있다. 펜네를 10분 삶는다. 그동안에 아침으로 먹을 샐러드도 만든다. 냉장고에 남아있던 자투리 야채. 오이 한 조각. 딸기 8알. 방울토마토 5개. 아보카도 반개까지. 빵도 데운다. 그래 이왕 10분이 있으니 챙겨갈 수 있는 건 다 챙겨 가는 거야! 샐러드? 5유로는 아꼈고, 빵 한 조각은 60센트. 그새 파스타가 다 삶아졌고 불어버리지 않게 올리브유를 휘리릭 부어 섞는다. 가지런히 용기에 담고 학교로. 요즘 실습이 점점 어려워져서 학교 가는 발걸음이 무거운 와중 가서 밥 먹을 생각하니까 괜히 신이 났다.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샐러드와 빵 한 조각을 해치웠다. 차에서 먹으니 불쌍하냐고? 전혀! 맛있으니 되었다. 점심은 친구들하고 먹어야지! 샐러드로 기분 좋게 적당히 배불러서 수업 시간에도 집중이 잘된다. 더부룩하지도 않고 말이다.
다국적인 반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 메뉴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통 대부분은 샐러드를 싸온다. 점심 저거 먹고 되겠나 싶지만 양이 한가득이라 풀만 먹어도 배부르다. 사실 소도 풀을 먹고 살찌니까. 두 번째로 흔한 메뉴는 파스타. 아무래도 조리가 간편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반 친구들은 내 도시락 통 속의 메뉴를 묻고 파스타라니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한국인이라 뭔가 아시아 메뉴를 가져올 것 같았나? 바빠 죽겠는데 김밥 쌀 수는 없는 걸. 그래도 밥 종류가 들어있지 않을까 싶었나 보다. 잘 먹으니 힘이 난다. 빵에 햄과 치즈가 들어 있는 차가운 자판기 샌드위치를 안 먹어도 돼서 좋고. 따로 소비한 게 아니고 냉장고를 파서 왔으니 적어도 10유로를 아낀 기분.
오랜만에 도시락을 쌌지만, 내겐 도시락의 추억이 많다. 특히 유로 환율이 이천 원에 육박할 때 유학했던지라 샌드위치 하나 손 벌벌 떨며 사 먹지 못했던 그때 그 기억. 샌드위치가 만원이라고? 하며 5유로짜리 샌드위치는 두 끼에 나눠 먹었고. 아침은 마트에서 가장 저렴한 시리얼로 때우고 하루에 제대로 된 식사는 한 끼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달에 5킬로가 쑤욱 빠지고 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도시락을 싸는 일이었다. 간단했던 잼 샌드위치 도시락은 점점 발전해서 팟타이 도시락도 되고 남은 카레도 학교에 싸가고 말이다. 김치는 참았다. 다행이었던 건 나의 친구들도 같이 동참해주었다는 점. 그래 맞아. 이 돈 주고 이 걸 먹긴 아깝지 하며 학교 캔틴 식사에 대한 험담도 늘어놓고 말이다. 도시락의 추억을 그동안 까먹고 살았다. 그땐 거의 외식이라는 게 없었는데 어느새 직장인이 되고, 시간이 없다 없다 하며 아주 간단한 메뉴까지 사 먹게 되었던 나.
없긴 뭐가 없나. 시간은 만들면 생기는 법. 잠시 15분 아침의 준비로 하루 풍성히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도시락 싸는 일에 큰 영향을 받은 건 최근에 어떤 재테크 책을 보면서 였다. 50대에도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책이었는 데 그 책의 저자가 일주일에 7만 원으로 네 식구 식사를 운용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뭔가 자극이 되었다. 7만 원이면? 우리 네 식구 스타벅스 두세 번 가면 끝. 한국보다 장바구니 물가가 저렴하다는 스페인에 살면서 뭔가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외식은 특별한 때 집에서 잘 먹지 못하는 메뉴로 하고 평소에는 더 부지런히 움직여서 집에서 장 본 것으로 해 먹어야지. 1유로 2유로 귀한 줄 알고 현명하게 소비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줘야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락의 의미를 잊고 살았다. 정성껏 음식을 준비해서 내 몸을 돌본다는 마음. 중요한 순간을 위해 허투루 돈을 쓰지 않는다는 마음. 버리는 재료를 없애며 지구를 지키는 마음까지. 오랜만에 도시락을 쌌더니, 오늘 하루를 무지출 데이 (돈 한 푼도 안 쓴 날)로 알차게 보냈다. 학교에서 케이크만 만들다가 오랜만에 초코 조형물 만드는 새로운 것 배웠고, 든든한 식사를 하고 실습을 할 수 있어서 그랬나 오늘은 셰프님의 평가도 좋았다. 샐러드는 맛의 궁합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파스타는 올리브유 덕택인지 많이 퍼지지도 않아 정말 맛있게 먹었으니 나름 성공적인 도시락이었다. 도시락 하나 쌌을 뿐인데 하루의 기분이 많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