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는 언제쯤 익숙해질까.
스페인 사람들은 수다쟁이다. 잠시 마주치는 인사도 한마디로 끝내지 않는다. 단톡 방에는 같은 말도 엄청 길게 쓰고, 심지어는 음성메시지 기능 쓰는 일도 허다하다. 짧은 말도 길게 하는 것이 예의 같기도 하고 혹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감정을 말로 표현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며칠 전 오랜만에 0층 이웃을 만났다. 그녀의 이름은 노에미. 북쪽 갈리시아 지방 끝에 있는 꼬루냐 지방 출신 은행원. 코로나 이전엔 일주일에 두 번 같이 운동해서 나름 이웃들 중에는 잘 지내는 사람이다. 아이 셋을 픽업하고 돌아오는 그녀와 마주쳤다. 마음은 반가운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가장 기본적인 인사 정도는 완벽히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뒤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락다운이 힘들고 집에만 있어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다고 해야 하나. 짧은 시간 머리가 팽팽 돈다. 결국 나는 안전한 말을 골랐다. 날씨도 너무 좋아서 집에만 있긴 아깝다는 말. 대학 시절을 보내던 아일랜드에서는 100프로 사람들이 늘 하던 말이었는데 여기선 어떨까. 스페인 사람들도 만나면 그런 얘기를 할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오늘은 스타벅스에서 다른 이웃을 만났다. 아니 우리 아파트는 한동짜리고 33가구밖에 살지 않는데 다들 생활 반경이 비슷한가? 어쨌든 나는 내 바로 뒤에 줄 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할 말이 도무지 생각나질 않았다.
'여기서 보네요. 반가워요.'
정도 덧붙였어도 좋았을 텐데 혹은 여긴 웬일인지 물었어도 조금 더 자연스러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수줍은 사람 마냥 안녕, 또 봐요. 하고 사라져 버렸다. 오늘도 이불킥각이다. 그냥 하고 싶은 얘기를 하면 될 텐데 나는 왜 어색한 잠시의 기다림을 참을 수 없는 걸까. 혹은 왜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며 이웃들의 눈치를 보는 걸까. 좋은 이웃이라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어제는 0층 집 둘째 아들이 우리 집에 인터폰을 하는 거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종종 열쇠가 없어 문을 열어달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 앞집 친구를 찾다 잘못 누르기도 한다. 익숙한 일이니 올라 인사를 건네고는 문을 열어줬다. 벨소리가 다시 울린다. 이 친구는 왜 우리 집 벨을 자꾸 누르지 하며 다시 받았다.
"하비에르 야, 너 여기 몇 호 인지 알지? 앞집 찾는 거면 여기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아니란다. 나랑 얘기하고 싶단다. 뭐라 뭐라 뭐라 뭐라... 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문 열어달라는 건 확실히 아니고, 앞집 아이를 찾는 것도 아닌데 우리 집 테라스에 뭐가 있다고 한다.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나는 나의 짧은 스페인어를 남편에게 들키기 싫어 내려가서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급히 옷 하나 걸쳐 입고 내려갔다. 친구와 놀고 있는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까는 무슨 일이었어?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이랬다. 친구와 총놀이를 하다 불렛 하나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단다. 그래서 그거 찾아달라고 한 거라고. (안타깝게도 이 모든 해결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장난감을 되찾아주고는. 집에 오며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너무 아쉬웠다. 그냥 상식선에서 말할걸. 무슨 일인지 물어보고, 어떻게 도와줄까 물어보고, 뭘 찾는지, 뭐가 필요한지 스페인어로 물어보는 게 뭐가 그리 힘들었을까. 생각도 전에 잘 모르겠다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것 같은 나의 타 언어생활.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대답도 잘 들어보려고 했으면 내려가지 않고도 인터폰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누굴 만나도 나에게 어려운 대화를 요구하지 않을 텐데 지레 겁나는 건 대체 왜일까.
이렇게 나의 스페인어는 오늘도 뒷북 모드다.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제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적어도 이해 안 되고요 ~ 모르겠고요 ~ 스페인어 못해요 ~라는 포기 식의 대처는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위로 삼아야 할까. 아니다. 어쨌든 높은 확률로 또 생길법한 일들이니 나는 오늘도 중얼중얼 다시 연습해본다. 해외 생활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는 리셋 장치 같은 거다. 나는 다시 학생이 되는 마음으로 이곳의 예의를 다시 배우고 천천히 체득해 가고 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니, 너무 슬퍼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