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
“저는 까망이예요. 아무도 날 알아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오늘도 까만 모자를 쓰고 치료실에 온 연아가 말합니다
그림책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를 함께 읽고난 뒤입니다. 연아는 글자를 읽는 것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연아에게 이 그림책을 함께 읽자고 했을 땐, 연아가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추지 않고, 자신이 가진 고유의 색깔을 스스로 찾을 수 있길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까망이라니. 아무도 알아보지 않았음 좋겠다니.
“친구들도요. 내게 말을 안 걸면 좋겠어서 그냥 조용히 있어요.” 라고 까만 모자를 눌러쓴 채, 나직히 이야기합니다.
그림책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마이클홀 글·그림, 봄봄)는 자신이 ‘빨강’인 줄 알고 있던 ‘파랑’의 이야기입니다. 파랑이였기에 수없이 연습하고 연습해도 ‘빨간색’을 그릴 수 없던 빨강이에게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합니다.
‘게으른거다, 더 노력해야 한다, 나아질거다...’
하지만 빨강이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문방구들이 빨강이를 돕겠다고 나섭니다. 테이프는 빨강이가 부러졌다고 생각해 테이프를 붙이고, 가위는 빨강이의 포장지가 너무 꼭 낀다고 생각해 살짝 잘라보고, 연필은 빨강이가 너무 뭉툭하다고 생각해 연필깎이로 깎아도 봅니다. 모두 빨강이가 빨간색을 그릴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왔지만 빨간색을 그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기만 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빨간색을 표현할 수 없었던 빨강이의 모습을 보며 제가 만나는 아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글을 읽는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은 게으르거나, 지능이 떨어지거나,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로 오해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읽는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을 처음 만나면, 학교를 폭파하고 싶다거나, 국어를 안 하고 살겠다거나, 엄마 뒤에 숨어 말 한 마디 하지 않거나, 눈물부터 쏟아내는 일들이 빈번했어요.
그림책 ‘빨강 크레용의 이야기’에선 빨강이가 ‘파란 바다’를 그려달란 새 친구를 만납니다. 그동안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빨간색'을 어떻게든 표현하게 하려고 '빨간색'만 요청해왔는데, 처음으로 '파란색'을 그려보란 친구를 만나게 된 겁니다. 빨강이는 자신이 빨간색이기 때문에 ‘바다’를 그리는 일이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친구의 격려에 빨강이는 용기를 내었고, ‘파란 바다’를 그려냅니다.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청바지, 파랑새, 블루베리, 파란 고래’ 등을 차례차례 그리다가 깨닫습니다.
"난 파랑이야!"
드디어 빨강이가 진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파란바다'를 그려보란 친구는 빨강이가 가진 '파랑'이란 본질을 알아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까망이예요.”
자신을 까망이라고 표현했던 연아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립니다. 그래서 연아가 지금 가진 어려움보다 자신에게 자부심을 더 가졌음 했어요. 읽는 어려움은 읽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고, 그 다른 방법을 배우며 연습을 열심히 한 덕분에 스스로 못 읽어내는 글자도 없고, 제법 유창하게 글도 읽고 있으니 말입니다. 연아가 빨강이나 파랑처럼 형형색색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길 바랬습니다.
연아가 말하는 '까망'은 친구들 사이에서 상처받을까 거리를 두고 있는 마음일 수도 있고, 수업시간에 잘 모르겠는 막막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아의 까망이를 떠올리다보니, 자신이 드러나지 않길 바라는 까망이란 연아의 마음부터 존중하는 게 먼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색들이 모여야 까만 색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언젠가 연아도 알게 되겠지요.
지금의 ‘까망이’가 얼마나 빛나는 것들을 품고 있는지요.
여전히 연아는 까만 모자를 눌러쓰며 다닙니다.
연아에게 까만 모자가 참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연아가 웃습니다. 까만 모자 아래 연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납니다!
.작은책 3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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