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은 책약방의 생일입니다. 2018년도에 처음, “오늘 책방 문을 열었습니다.”란 인사를 건네었어요. 언젠가 지면을 통해 소개를 했지만, 책약방은 책방지기가 상주하지 않는 무인책방입니다. 책방엔 늘 그림일기장이 놓여있습니다. 책약방의 일기장엔 한 권의 책 같은 이야기들이 쌓여갔어요. 책방지기인 저역시 수없이 뒤척임이 다녀가도, 늘 평화로움을 잃치 않는 공간이 되어주었던 건 이 일기장에 쓰인, 책방에 깃든 사람들의 마음 덕분이였습니다. 요즘은 부쩍 책약방의 일기장에 유난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는 마음을 담은 일기가 많았어요.
이곳은 마치 내 어릴 적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스무살이 넘는 사람들을 보며 어른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스무살이 훌쩍 넘는 나이가 되니 어른이 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였다. 세상이 두렵게 느껴졌다.
나는 과연 잘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냥 어렸을 적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로 도망치고만 싶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느 책에서 봤는데 어른이 되는 것은 하나씩 포기하는 거라고 했어. 나도 어릴 땐 꿈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책약방일기장 속 일기 中)
꿈을 하나씩 포기하게 되는 게 어른이라는 글, 세상이 두려워져 어린 시절로 도망치고 싶다는 일기장 속의 글들을 보며, 그림책 <다시 그곳에(나탈리아 체르니셰바, JEI재능교육(재능출판))>가 떠올랐어요.
자동차 경적소리와 빌딩 숲으로 가득찬 도시에서 한 여자가 ‘노란버스’에 오릅니다.
그림책 <다시 그곳에>의 첫 장면입니다. 한참을 달려 ‘노란버스’는 어느 한적한 시골에서 멈춥니다. 빨간 열매나무가 지붕 위까지 자란 작고 작은 시골집 하나가 그녀를 맞이합니다. 이미 어른이 된 그녀에겐 자신의 모습보다 훨씬 작고 작은 집이였지요. 그녀가 집 앞에 서자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집니다. 그 열매를 모으고 있던 할머니는 고개를 들어 여자를 보지요. 할머니와 그녀는 서로를 반깁니다. 할머니보다 훌쩍 커버린 그녀가 할머니가 쓰고 계셨던 노란 모자를 자신의 머리 위에 얹어 놓아요. 할머니는 그녀를 위해 따스한 한끼를 준비합니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음식의 냄새가 코끝을 지나자 내 모습은 아주 작고 작은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할머니의 음식을 기다리던 꼬마의 모습으로 돌아가 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아요.
이 그림책을 몇 년 전, 전쟁을 겪고 있어 제주에 온 예멘에서 온 아버지 몇 명과 읽은 적이 있어요. 가족을 모두 예멘에 두고온 ‘아빠’들이였지요. 빨리 일자리를 구해야 해서 한글을 속성으로 가르쳐주던 때, 이 그림책을 나누고 난 뒤 아빠들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렀어요. 그리고 며칠 뒤, 한글을 가르치는 우리들에게 고향의 음식인 난을 만들어 대접해주었습니다. 언젠가 노란 버스에 올라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어느날을 꿈꾸었을지, 두고온 가족들이 그리웠을지, 유년기의 어느날을 떠올렸을지 알 수 없지만 손 위에 올려놓은 따끈한 난을 집어들고 함께 나누는 그 시간 만큼은 그림책처럼 할머니의 음식과 어린 시절의 내가 나란히 곁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도 스무살에 고향을 떠나 22년 동안 타향살이를 하다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저역시 어른이 되면 더 단단하고 멋진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고향에 돌아온 저는 제가 꿈꿨던 멋진 어른의 모습은 아니였습니다.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 앞 운동장을 찾아갔을 때 그렇게 무섭고 두려웠던 구름사다리와 철봉이 제 키보다 훨씬 작고 작은 모습으로 서 있는 걸 보며, 달리기는 늘 꼴찌였고, 단 한 번도 철봉에서 하늘을 향해 한바퀴 돌아본 적이 없고, 구름사다리 위에선 벌벌 떨던 제 모습이 떠올랐어요. 하지만 한없이 실패를 경험했던 이 찰나들 덕분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의 마음이 더 잘 보이고, 아이들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자 꿈꿨던 멋진 어른의 모습과는 달라도 지금과 같은 어른이 된 제 모습을 안아주고 싶었어요.
그림책 <다시 그곳에>는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란버스에 올랐을지 설명하는 문장은 없지만 그녀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책약방에 남겨진 일기들처럼 어른으로서의 삶에 많이 지쳐있었다는 것을요.
하지만 여기 종달리 책약방에 오니 내 어린 시절 꿈들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나는 이제 서른 한 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현실의 벽이라는 거 때문에 포기했던 내 자신에게 미안해지네.
하지만 제주에서 드넓은 하늘과 넓은 바다, 숲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냥 오늘 하루 노을을 보며,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면 그걸로도 충만하고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며 소박하게 느껴지는 이 작은 행복을 내가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책약방일기장 속 일기 中)
우연히 문을 연 “책약방”이 누군가의 어린 시절로 이끄는 그 ‘노란버스’가 되어주는 것은 아닐까요.
지치고 버거울 때, 떠올릴 수 있는 ‘그곳’이 하나 있다면, 그리운 ‘그곳’이 있다면, 책약방은 ‘노란버스’가 되어 달려갑니다.
. 작은책 <10월호 >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