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이에게 쓰는 편지.
2017년 6월 5일의 일기장에서.2017년 6월 5일의 일기장에서.
수업을 마치고 카페에 갔어요.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면서 노트에 생각을 담아낸 후에, 선선한 바람을 따라서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어요. 퐁네프를 지나는데 흐린 날씨 탓인지 요즘답지 않게 사람들이 많지 않더군요. 에펠탑을 넘어 센느강 끄트머리에서는 지는 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어요. 그 눈부심에 반대쪽 다리 밑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아저씨를 보았지요. 혼자 다리 밑에 앉아 백팩을 두 다리 사이에 두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요. 여행객 같은 옷차림이었지만 여행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퇴근하고 온 직장인처럼 보이지도 않았어요. 아저씨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했어요. 어떤 하루를 보내고 혼자 퐁네프 밑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문득 아저씨에게 우리는 왜 살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내가 불어를 좀 더 잘했다면, 덜 피곤했더라면, 넉살이 좋았더라면, 더 재미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대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요.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왜 살고 있는지. 무엇이 오늘 나를 살아있게 해 주었는지, 어떤 것이 삶을 계속하고 싶게 만들어주었는지 아저씨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지 떠올렸어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 나를 웃게 해 준 순간들이 끝도 없이 떠올랐어요.
점심시간에 오랜만에 보스네 집에서 보스네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었어요. 주말 동안 만든 음식들과 케잌을 함께 먹자며 초대해 주셨고, 그 마음에 기분이 좋았지요. 점심을 먹고 보스의 딸 조에와 비디오 게임을 했을 때도 좋았어요. 마지막 판에서 조에를 이기게 해 주려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던 내 모습도 좋았고, 너무나 기뻐하던 조에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도 좋았어요.
수업에서는 미국인 친구가 미국식 R발음을 그대로 유지한 채 프랑스어를 너무나 열심히 말하던 모습이 귀여워 자꾸 웃음이 났고, 브라질 친구와 태국 친구가 불어로 대화하는 것을 내가 중간에서 불어로 통역을 해줘야 하는 상황도 너무나 웃겼지요.
주말 동안 벨기에에 다녀온 니와카는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카키색 호텔 샤프를 가져와 선물해 주었고, 그 샤프로 글씨를 쓰는 모든 순간이 좋았어요.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만을 떠올리며 한참을 걷다가 집 앞 뤽상부르 정원으로 들어왔어요. 할아버지들이 모여 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고, 그 옆에는 퇴근하고 온 아저씨들이 수트를 입은 채 테니스를 치고 있었어요. 그 앞에는 스트레칭을 하는 여자가 있었고, 조금 더 지나가니 내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 옆 큰 나무에는 아빠가 천사 같은 딸이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고 있었지요. 그 순간 내 눈앞에 새 한 마리가 나타났어요. 여태까지 본 새 중에 가장 아름다운 색의 깃털을 가진 새였어요. 전체적으로는 진한 베이지에 하늘색, 흰색,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가진 새였어요.
어쩌면 그냥 지나칠 뻔한 오늘의 모든 행복한 순간들이었어요. 아저씨는 내가 아저씨로부터 이 모든 이야기를 떠올렸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요. 그것도 생각해 보니 재미있네요.
집에 와서 씻고 조깅을 하러 다시 뤽상부르 공원으로 갔어요. 언제나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저녁시간에도 조깅을 하고 있었어요. 내 옆에는 한 아저씨가 힘들게 달리고 있었어요. 우리는 왜 이렇게 힘들게 달릴까 생각했어요. 왜 힘들지만 계속 움직여야 할까,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결국 나는 위에 나열한 저 모든 순간들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저 모든 순간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요. 함께 건강하게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보내는 시간이, 아이의 미소가, 친구들과의 소소한 시간들이,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아름다운 자연의 형태가 나를 깨어있게 해주는 것을.
오늘 나에게 영감을 주어 고마워요. 그러고 보니 누군가에게 영감이 되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일 것만 같네요. 행복하세요. Bonne nu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