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는 어떤 사람들이 오게 되었는가.
어느 토요일, 아뜰리에 뒤편 테이블로 각자 싸 온 도시락을 가지고 모여 짧은 점심시간을 보냈다. 나의 오른편에는 중국인 재봉사 J가 앉았고, 왼 편에는 알제리인 재단사 F가 앉았다. 내 또래의 아들 딸들을 가진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나의 안부를 물어줬다. 두 사람이 프랑스에 온 지는 20년이 되어가지만 마치 나를 볼 때면 처음 타지에 나와 발을 내딛던 때가 떠오르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이 날도 그녀들이 나에게 질문을 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국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F의 동생 이야기가 나왔고, 그러다가 나는 그녀에게 프랑스에서 사는 게 좋은지 알제리에서 사는 게 좋은지에 대해 물었다. 가벼운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순간 F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프랑스에 사는 것이 좋다고 했다. 알제리에서는 여자가 남자와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곳은 여전히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국가였다. 알제리는 대다수인 아랍인과 소수의 카빌인(베르베르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현 아랍 정부로부터 카빌인들은 차별과 위협을 당한다고 했다. F의 가족은 카빌인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의 고등학생 조카가 군인으로부터 총살을 당했고, 그 사건 이후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그런 나라에서 자식들을 키울 수 없다는 생각에 유럽 연합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F가 자신의 폰으로 조카의 이름을 검색해 보여주었다. Massinissa Guermah. 찾아보니 같은 해(2001년) 알제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카빌인이라는 이유로 희생되었다.
F는 그렇게 자기 소유의 회사도, 친구들도 남겨둔 채 프랑스로 넘어와 이 회사의 재단사로 일하게 되었고, 나는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완전한 프랑스인을 찾는 것이 더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 아뜰리에의 직원들은 대부분 프랑스 국적을 가진 이주민이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다른 나라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다른 오리진(Origin)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에도 많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내 눈으로 보게 된 다양한 인생에 대해 깊게 생각하곤 했다. 어학원에서 만난 멕시코인 친구 H에게서는 또 다른 인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H의 남편은 Jeu de paume이라는 테니스와 흡사한 스포츠 종목의 코치였다. 오늘날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Jeu de paume은 몇몇 국가에서 로열 스포츠가 되었다고 했다. H의 남편이 일하는 파리의 유일한 Jeu de paume 클럽에서는 부르주아들의 만찬이 열린다고 했다. 백인 재벌들 그리고 자기 아빠와 같은 양복차림을 한 십 대의 남자아이들이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만나는 일종의 사교클럽인 것이다. H가 보여준 유튜브 영상에서는 22살의 프랑스 대표 jeu de paume 선수가 H의 남편과 함께 인터뷰를 했다. 영상을 보면서 우리는 그 선수에게 근육이라곤 없어 보인다고 말했고 H는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선 그는 사교클럽 출신의 부잣집 아들이고, 또 대표 선수로서 엄청난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당연히 파리의 큰 아파트에서 도우미까지 고용해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아뜰리에에서, 매일 같은 옷을 입고 하루종일 재봉틀 앞에 앉아 옷을 만드는 재봉사 아줌마 아저씨들을 보았다. 무슈 B는 유일하게 일어서서 바깥공기를 쐴 수 있는 시간을 누리기 위해 샌드위치를 들고 동네를 걸으며 점심을 해결했다. 나는 그들이 부탁한 준비 작업이나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답을 내릴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생각들을 끊임없이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주말 동안 나의 허리와 어깨가 아프도록 준비작업을 했던 발렌시아가 원피스 두 벌과 인스타그램에서 본 그들의 예쁜 화보에서 괴리감을 느꼈고 하루종일 갇혀 있는 재봉사들과 모두의 관심을 받는 디자이너와 모델들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화가 났다. 그나마 이곳은 좋은 환경의 아뜰리에이지만 훨씬 열악한 큰 공장에서 수만 장의 작업을 하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답답해지곤 했다.
나는 이 두 세계 사이에 끼여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몰라 머리가 아팠다. 한국에서는 서울에서 4년제 대학을 다녔고 친구들은 대기업에 취직을 하곤 했지만 이곳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온 직원들 틈에 앉아 손작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내게 바라는 바는 어디에 있더라도 오만해지지 않고 겸허한 자세를 지니는 것, 끊임없이 세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 누군가에게 위화감을 주기보다는 위로가 되는 사람으로 존재했으면 좋겠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외국인으로서, 동양인 여자로서 겪으면서, 자신감을 얻는 일보다는 떨어뜨리는 일을 더 많이 경험하고,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없을 수는 없지만 나의 젊은 날에 이러한 도전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힘이 된다. 내가 파리로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파리가 옛날의 아름다운 파리가 아니다, 난민 문제로 시끄럽고 위험하다는 걱정을 많이 해주었다. 실제로 그랬다. 하지만 다양한 인생이 살아갈 수 있는 이 도시에서는 그래서 더 배울 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