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火)
나에게 화가 나는 날이 있다.
남 탓 할 것도 없이 순전히 내 속에서 불씨가 일어 화염을 내뿜는 날.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감정 기복 조절에 실패해서 하루를 망쳐버린 날,
쓸데없는 고민과 걱정들에 매몰되었을 때,
외부의 사소한 충격에 타격감 좋게 당해버린 나를 마주할 때,
손톱 물어뜯는 습관을 고치지 못해 손이 엉망일 때.
나 자신이 한심하고,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런 날이 있다.
이런 날은 괜히 엄한 곳에 화풀이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물러설 곳 없는 지하실에 갇혀 갑갑한 기분이 들어 단전에서 깊은 한숨이 올라온다.
화도 여러 종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으 화가 난다!!!! (부들부들)
휴 너무 화 나 ㅠㅠ..
허 진짜 열받네..?
이유라도 알면 다행인데, 세탁기에서 방금 나온 빨래처럼 이유도 없이 축 쳐지는 날도 있다.
그럴 땐 정말 난감하다.
나와 대립하는 남을 납득시키는 것도 아닌데, 고작 나 스스로를 진정시키지 못하다니.
말 못 하는 돌쟁이를 달래는 일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감정들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생각조차 나지 않을 텐데
갈대 같은 감정의 변화에 무력하게 휩쓸리는 연약함을 어찌하면 좋은가.
사람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당신이 이해받고 있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라는 구절을 봤다.
그럼 내가 나에게 화가 나는 건, 내가 나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느껴서일까?
나의 불안과 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스스로에 대한 기준을 너무 높게 잡고 있는 건 아닌가.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한 날들의 공통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대부분 내가 나에게 만족한 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스로 ‘잘’ 서 있다는 느낌, 더불어 오늘도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는 느낌을 받은 날이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고, 이런 모습의 나도 있고 저런 나도 있는 것인데
너무 몰아붙여서 내 안에 꼬마가 분풀이를 하는 건가?
갑자기 거센 파도가 밀려오면 오히려 숨을 참고 그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
괜히 파도를 넘어 보겠다고 덤비다가 휩쓸려 버리면 순간 호흡을 놓치고 허둥지둥하다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젠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감정의 조절이 힘들 때면 ‘아, 나를 좀 봐줄 때구나.’ 하고 노트를 펴본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파도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런 날은 해야 할 일은 하되, 스스로를 체근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장에 담판 지어야 하거나,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확률이 높다.
조금은 가볍게 세상과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을 갖는 노력이 필요하다.
파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