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심정으로...
석 달 전 일이다.
홍 팀장이 윤 사원을 혼낸다. 벌써 여러 번 목격하는 장면. 윤 사원도 딱하지만 홍 팀장도 안쓰럽다. 팀장 회의가 끝난 후 홍 팀장에게 왜 윤 사원을 야단치는지 물었다. 여러 번 알려줬음에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단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심정이라고. 언제까지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함을 호소하던 홍 팀장에게 내가 해준 말은 그저
계속 가르쳐줘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나는 어떤 학생을 만나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첫 담임 인사 때, 풋풋한 총각 선생님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반짝이는 눈빛은 나를 더욱 설레게 했다. 지나치게 설레었나. 학생들과 지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에게 실망하는 순간도 누적되고 나는 점점 잔소리꾼이 되어갔다. 이게 아닌데. 왜 학생들은 내 말을 따르지 않고 변하길 거부하는 걸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학생들을 보며 나의 교육 활동이 무의미한 건 아닐까 생각했다. 교무실에서 풀이 죽어 앉아있는데 옆자리의 나이 지긋하신 선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콩나물시루에 물 주는 것 같지?
물 주는 대로 쫙쫙 빠져나가잖아.
가르치는 일이 그래.
신기한 건 물이 그렇게 빠져나가도
콩나물 자라듯이 학생들도 꼭 자라더라.
그러니깐 계속 혼내줘"
정말이지 봄, 여름에는 그리도 산만했던 학생들이 가을, 겨울이 되면서 차분해지고 담임의 말도 곧잘 따랐다. 수업시간 내내 멍 때리기에 수업 후 따로 불러 자주 훈계했던 학생은 어느새 펜을 들고 교과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뱉어냈던 잔소리들이 마냥 흩어지지 않고 쌓이기도 했나 보다.
학생들만 자란 건 아니다. 초임 시절 나와 함께 어설픔을 담당했던 내 또래 교사들은 경험이 모이고 경력이 쌓이면서 고수가 되어갔다. 그들 역시 깨지고 넘어지고 좌절하는 순간이 많았지만 멈추지 않고 교육활동을 이어갔고 지금은 모두들 베테랑 부장 교사가 되어 학교를 휘어잡는다.
교사를 그만두고 사업 전선에 뛰어든 후에도 처음에는 모든 게 다 어설펐다. 사업 특성상 글을 종종 써야 하는데 나의 글쓰기가 특히 불만이었다. 글쓰기 관련 책을 다분히 읽어보고 강연도 들어보며 나름 연습했지만 내 글은 늘 부끄러웠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라는 책을 만났고 작가가 일러준 글쓰기의 세 가지 원칙인 ‘조금씩, 날마다, 꾸준히’를 실천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쓰다 보니 글이 좀 더 매끄러워졌고 덤으로 자료도 많이 모였다. 그간 모은 자료를 토대로 <마케팅 때문에 고민입니다>를 출간했다. 매일 시루에 물 주다가 맛본 열매다.
남자는 달리기가 빨랐다. 그는 위대한 육상 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좋은 육상 선수가 되는데 그쳤다. 더 이상 육상 선수가 아니었지만 그는 매일 달렸다. 사업을 결심하면서, 일본에서 운동화를 수입해 팔 때, 현금이 없어 부도 할 위기에서도, 마침내 새로운 브랜드를 창조하는 순간에도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결승선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격렬하게 달리며 스스로 다짐했다고 한다.
멈추지 않고 계속 가자.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멈추지 말자.
달리기를 멈추지 않은 남자 ‘필 나이트’ 덕분에 나는 나이키를 신고 출근한다. 위대한 육상 선수의 달리기는 아니지만 멈추지 않았기에 위대한 스포츠 기업이 탄생했다.
콩나물시루에 물 주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콩나물밥이든, 콩나물국이든, 콩나물무침이든 뭐 하나는 먹지 않을까?
부디 헛수고라 생각하지 말자. ‘밑 빠진 독’일지언정 콩나물은 자란다.
요즘 홍 팀장은 윤 사원을 보며 생각한다.
“오....!”
*배경출처: tvN '미생'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