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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굴러가는하루 Sep 22. 2023

좀 더 잘 살고 싶은 퇴사 예정자의 다짐

가을의 인왕산을 걸으며 생각한 것

스트레스가 넘쳐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종종 있다. 그럴 때는 스스로에게 '걷기'라는 처방을 내린다. 최근에도 무아지경으로 걷고 싶은 적이 있었다. 3년 넘게 다닌 회사에서 퇴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였다.


직장에서 에너지를 잃은 지는 꽤 됐다. 언제부턴가 나는 일의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하루하루 업무를 쳐내는 것에만 급급했다. 일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꺼려졌고,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다는 느낌잦았다. 성취감도 점점 줄었다. '난 어쩌다 일에 동기를 잃었을까?' 명확한 대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의미도 목적도 없이 계속 직장을 다니기보다는 지금은 일단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과 일에 관한 마음가짐을 정리하면서 진로를 다시 한번 고민하는 시간 역시 필요했다.  


회사와 마지막 출근 날짜를 합의한 후에는 며칠 휴가를 쓰고 쉬었다. 말이 휴가였지 기분은 전혀 쉬는 게 아니었다. 원래였으면 출근할 시간에 느긋하게 방에 누워 있으니 스멀스멀 불안감이 밀려왔다. '남들은 지금도 부지런히 살고 있을 텐데 나 정말 퇴사해도 되나?' '난 이제 어리지 않은데 진로를 다시 찾는 게 너무 철없나?' '그래서 앞으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꼬리를 무는 불안감과 자기 의심을 진정시킬 방법은 역시 걷기였다.


곧장 경복궁역 1번 출구로 가서 매동초등학교 앞 골목을 통해 인왕산에 올랐다. 날씨는 맑다 못해 쨍쨍했는데 다행히 어디선가 바람이 슬슬 불어왔다. 땀은 나지만 제법 산뜻한 기분으로 등산하다 보니 어느새 무무대 전망대에 다다랐다. 무무대는 '아름다운 풍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라는데, 실제로 그곳에서 본 뷰는 넓고 탁 트여서 마음이 개운해졌다.


무무대에서 바라본 풍경


무무대의 의미처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언제나 작고 아름답다. 오밀조밀 귀여운 건물과 데굴데굴 굴러가는 자동차를 보자면 어릴 때 갖고 놀던 미니어처 장난감이 생각난다. 그렇게 예쁘고 앙증맞은 세상에서는 그곳에 사는 인간들 역시 아주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인형처럼 느껴진다. 사랑스러운 세상과 사랑스러운 인간들. 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다웠기 때문인지 나도 그 예쁜 세상에 어울리게 야무지게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참 많이도 걸었다. 졸업 후 뭘 할지 몰라 혼란해하던 대학생 도, 밥벌이는 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취준생 도, 종일 모니터를 보면서 건조한 눈을 부릅뜨던 직장인일 때도 틈만 나면 걸었다. 집 근처 하천, 졸업한 고등학교, 한양도성길 등을 걸으며 끊임없이 나에 대해 생각했고, 때론 모든 생각을 비워냈다.


지겹도록 걷고 또 걸었던 건 막연한 어떤 느낌 때문이었다. 근거는 없지만 계속 걷다 보면 왠지 길 위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난다는 노래처럼 걷기를 통해 어떤 인사이트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어떤 인사이트, 그건 언제나 지금보다 좀 더 '잘 살고 싶다'는 마음에 대한 것이었다. 때론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헷갈려하면서도 그냥 잘 살고 싶었다.


그렇게 만 보, 이만 보까지 걷다 보면 다리에 힘이 빠지고 숨이 차오르고 땀이 흐르는데, 그 순간 신기하게도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비록 '잘 사는 것'에 대한 답을 매번 찾은 건 아니지만 전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을 맛볼 수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인왕산을 오르는 동안 '퇴사자로서 잘 사는 것'을 고민했다. 머릿속에 흐트러진 생각들을 이리저리 조립해본 결과, 지금 나에게 '잘 사는 것'은 '나다운 내가 되는 것' 그리고 '나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다니는 3년간 나는 내 주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NO를 말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이런 프로젝트를 같이 해보자' 하면 여력이 없어도 일단 따라나섰고, '앞으로 조직 환경이 이러이러하게 바뀔 것이다' 하면 큰 불평 없이 받아들였다. 당시에는 내가 성격이 무던하고 포용력이 좋아서 이것저것 다 잘 수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건 나를 버리고 남들 입맛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었다.


백수로 사는 동안은 좀 더 오롯한 내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나를 표현하기 위한 시도를 많이 할 것이다. 일을 하지 않고 수입이 없다는 불안감은 감수해야겠지만, 남아 있는 긴 인생을 더 '잘 살기 위해' 숨을 고르는 시간으로 여기려 한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화창하고 예쁜 가을 속을 걸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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