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영 Apr 06. 2024

아프니까 회사원이다.

 몇 번의 이직과 번아웃을 거쳐 약간의 우울증과 불안증을 가지고 20대의 절반과 30대의 초반을 보냈다. 만 나이로는 아직 서른둘이라는 점에서 얄팍한 위안을 얻으며 정신승리해 보지만 그래봤자 빼박 삼십 대가 된 지금. 계획한 것도, 아픈 것도 아닌 채로 퇴사를 감행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친구들과 같이 일할 생각에 고민 없이 이직한 회사는 번지르르한 겉모습과는 달리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래, 뭐든 우당탕탕 굴러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도 우당탕탕 굴러서 어느 때는 좀 쉬어가기도 해야 하는데 미친 듯이 달리기만 했다.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매일 야근을 해보니까 몸도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이유 모를 염증으로 고생하다가 연말 연휴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서 토도 했다. 번아웃도 아니고 우울증도 아니었는데 직감적으로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연말이 지나고 새해 첫 출근 날, 내 팀장님이자 친구에게 말했다. "새해 선물로 할 말이 있어."

그는 담담히 내 말을 받아들였다. 나는 버티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고, 그는 지옥으로 끌고 와 미안하다고 했다. 그렇게 이력서의 한 줄을 날려먹고, 서른넷의 새해를 맞이했다.

그만둔다고 하니 대표가 하는 말이 8년 전쯤 내가 사회초년생 때 들었던 말과 비슷했다.


"남아서 더 해보면 로켓에 올라타는 것처럼 남들보다 더 빨리 갈 수 있어요. 남들이 정석대로 밟는 길을 2-3년 만에 갈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쩌나. 나는 남들보다 빨리, 높이 가는 걸 원한 게 아니라 오래, 멀리 가고 싶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면서 가고 싶었다. 이대로 40살까지 간다면 아마 병원비가 더 나오겠지.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모든 걸 맞추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가는데 이게 정말 내 성과 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회사의 전략을 고민할 때도 내 인생의 전략은 누가 짜나 싶고, 방향성을 놓고 씨름할 때도 내 삶의 방향은 이게 맞나 싶었다. 이대로 쭉 가면 어디쯤 도착해 있을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내는 걸로 된다고 생각했는데,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이건 열심히가 아닌가? 얼마나 더 노력하면 인정받게 될까. 난 그저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고 회사를 다니고 싶을 뿐인데.

혹시 아프니까 회사원인 걸까. 아프지 않고서는 회사를 다닐 수가 없는 것인가. 3년을 넘게 근속한 회사가 없으니 조금 슬펐다.


회사를 그만두고 2달이 지났다. 일이 하고 싶음과 동시에 두려움이 앞선다. 이번 회사도 잘못 걸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다. 이제 이직도 그만하고 싶고, 야근도 그만했으면 싶다. 패션회사는 박봉에 야근을 피할 수가 없는지 면접을 가는 곳마다 야근을 하면 반차를 준다고 하고, 밤 11시 넘으면 택시 타도 된다고 해서 할 말을 잃었다. 돈으로 주세요, 돈으로!


회사를 꼭 가야 하는지, 혼자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 순 없을까 싶어서 부업을 시작했다. 지금 백수니까 본업인가? 백수가 된 회사원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이 일에 이름을 붙였다. '회사 밖에서 살아남기 프로젝트‘다. 당장 돈은 안되지만 이왕 시작한 거 계속하고 있다. 회사 가기 싫으니까. 회사 밖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때까지 이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영영 끝나지 않으면 어쩌지……? 그래도 계속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잣 한 알의 기쁨과 슬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