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생각지도 못한 커뮤니티라는 단어가 개입되면서이다. ‘연대’에 대한 사적인 생각을 늘어놓은 첫 번째 글에서 사용한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열광하던 문화’와 ‘붉은 악마’ 예시가 워크 보트 멤버 물비늘 님을 혼란스럽게 했나 보다. 딱 한두 줄이었는데.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의 기인을 쫓다가 번뜩 스쳐 지나가는 것을 옳거니 하고 붙잡고, 양념을 칠 목적으로 쓴 것이었는데. 그 긴 글 중 꽂힐 포인트도 많은데 왜 하필 그 예시가 문제가 되었을까.
그래도 물비늘 님은 그 혼란을 뚫고 나름대로 정리가 되었던 것 같다. 들이민 것은 ‘연대를 커뮤니티’로 생각하니 받아들여지더란다. 오! 뭔가 색달라 감탄은 내뿜었지만, 나는 이때부터 혼란스러워졌다. 연대가 커뮤니티라니. 뭔가 결이 다른 것 같은데 딱히 구분되지 않았고, 깔끔하게 그 차이를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연대’이든 ‘커뮤니티’이든 이들의 개념을 느낌적인 느낌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연대’와 ‘커뮤니티’의 실체가 궁금해서 뒤적여보기 시작했다. 제대로 알아야 그 차이가 선명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더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결국 다 던지고 외쳤다. ‘연대, 뭣이 중헌디 내가 이라고 있당가!’
그래도 실마리는 잡아야 했기에 다시 숨을 고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여기저기를 헤매어 다녀보았다. 그리고 지인을 만났을 때 의견을 나누기도 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해보았다(해보는 척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내린 (아주 사적인 관점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커뮤니티’와 ‘연대’ 용어는 사회 전반적으로 흔하게 사용되면서 그 뜻이 혼용되어오기도 했지만, 인터넷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그 개념이 확장되어 왔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 같다. 그리고 ‘커뮤니티’와 ‘연대’는 같은 명사이지만, ‘커뮤니티’를 온전하게 하는데 ‘연대’ 또는 ‘연대감/연대성’이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또 ‘커뮤니티’나 ‘연대’는 관계를 기반으로 점점 힘이 강해진다는 점에서는 유사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커뮤니티와 연대, 따로 또 같이
커뮤니티의 사전적 의미는 공동체 및 지역사회 등을 의미하는 말로 ‘공통의 생활공간에서 상호작용하며 유대감을 공유하는 집단’을 뜻한다. 즉, 물리적 공간에서 상호작용을 통한 소속감과 결속력이 응집되면서 이루어지는 집합체인 것이다. 여기서 ‘상호작용을 통한 소속감과 결속력’이 연대로 해석될 수 있다. 유사하게 이원훈·이창석(2007) 역시 커뮤니티를 ‘동일한 지역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연대의식을 통하여 공동의 가치와 이익을 참여하고, 상호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집단’으로 정의하였다.
이처럼 전형적인 커뮤니티 의미에서 공간이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온라인 문화가 확산되면서 여러 요소 중 공간의 중요성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대신 관계 기반의 연결과 상호작용 그리고 연대를 강조하는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티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겨나고 있는 추세이다.
산업 영역을 불문하고 커뮤니티 전성기 시대인 요즘은 비즈니스 목적으로도 사용되기도 하고,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의견을 나누며, 취미를 공유하고 친목을 다지는 유·무형의 모임으로도 활용된다. 예를 들어, 지역 공동체의 다양한 활동을 연결하고 주민 간의 소통 촉진을 내세우는 지역 커뮤니티, 정보를 교류하고 취미와 취향을 공유하는 플랫폼 기반의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 독서 커뮤니티인 트레바리, 여성 커리어 라이프 성장 플랫폼을 내세우는 헤이조이스, 창고살롱, 뉴그라운드 등 지역에서 비즈니스까지 커뮤니티 형태가 다양하게 확장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오픈형의 플랫폼 커뮤니티의 경우, 연대감이 부재한 까닭으로 사람들이 모여 군집이 되지 못해 지속 가능성 면에서 한계를 보인다. 즉 결속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를 보완한 것이 멤버십 바탕의 커뮤니티인데, 일정의 금액을 지불하면 멤버십을 확보하게 되고, 특정한 목적과 관심사의 콘텐츠를 공유받는 혜택을 누리게 된다. 또한 적극적인 참여를 커뮤니티의 주요 요소로 보고, 멤버들 간의 교류를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장치를 계속 흐르게 한다. 즉, 참여를 통해 자신의 역할을 찾고, 소속감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시작으로 연대성/연대감이 흐르면서 공동체 의식이 고취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타인을 필요로 하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계를 맺어간다. 연대를 어떠한 목적을 두고 이에 동의하는 여러 사람들과 만나면서 하나의 힘을 얻기 위한 관계의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면, 연대성/연대감은 어떠한 공간에 있든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있든 상관없이 목적만 같다면 자동적으로 생성되어 내면에 흐르는 전해질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전해질을 구성하는 것이 처음 썰을 풀었을 당시 사용한 ‘공감’과 ‘소통’이라고 강조해본다.)
#지금의 BTS와 같이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열광하던 것과 붉은 악마는 무엇이었을까?
한국 주민운동교육원 박재천 님(2020)은 연대는 왜 하는지 조건 명제가 붙는 것이 아닌 인간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설명인즉슨 산불이 나면 걱정을 하게 되는 마음, 누군가 불이익을 당하면 가서 확인하고 도와주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 이 자체가 연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은 2018년 스웨덴에서 시작된 그레타 튠베리의 기후 위기 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이라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 시위는 급물살을 타고 같은 뜻을 가지고 있던 세계 여러 나라의 학생들의 마음을 불지폈고, 금요일마다 함께 모여 학교에 가는 대신 거리로 나와 시위하였다. 뿐만 아니라 SNS에 #fridaysforfuture라는 해시태그로 마음의 동참을 보여주는 사람이 불어나면서 그 힘이 더욱 세졌다. 연대의 확장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시이지 않은가. 문제의식을 제외하고 연대의 행동 방식을 대입해본다면 팬덤도 붉은 악마의 염원도 함께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는 면에서 연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 붉은 악마의 경우는 1997년 축구 관련 동호회에서 시작해서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 승전을 위해 조직적으로 결집해 응원해야 하는 필요성에 공감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아시아 FIFA 월드컵에 온 국민이 동일한 복장을 착용하고 거리로 나와 같은 마음을 보여주며 연대하였다. 이 모습은 해외에서도 주목하여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인간의 본질이 연대라는 말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쉽게 연대를 받아들이고, 연대를 보여주고, 연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이름이 붙여진들 연대를 벗어날 수는 없다.
‘연대’를 인간의 본질로 본다면 ‘연대’는 때로는 ‘팬덤’으로, 때로는 ‘커뮤니티’로, 때로는 ‘운동’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쓰여질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어떤 이름이 붙여진들 우리가 연결되어 있고 관계 안에 있다면 모두 ‘연대’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대는 늘 우리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