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년은 서로 다른 도시의 두 집을 오가며 살고 있다. 두 집 모두 가까운 데 도서관이 있다. 편의상 A도서관, B도서관이라고 하겠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A도서관 근처 집에 처음 이사 올 때, 도보 가까운 거리에 좋은 도서관이 있는 게 큰 기쁨이 될 거라고 설레 했다. 도서관은 가고 싶지만, 도서관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멀면 걷기에는 불편하고, 차 타고 가서 주차 걱정, 버스 타는 번거로움에 도서관에 자주 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서관 가까운 집에 막상 살게 되었어도 생각보다 A도서관에 자주 가지 않게 되었다.
'도서관 책이란 무릇 정해진 기간에 반납해야 해서 마음도 조급하고, 밑줄도 칠 수 없고 좋은 곳 모퉁이도 접을 수 없고, 생각나는 글귀를 책에다 메모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책을 씹어 먹을 듯 중요한 부분에 별표를 하고, 그때 그때 생각나는 걸 메모하는 나에게 빌려보는 도서관 책은 불편하니까...'
A도서관이 별로여 서라기보다 도서관 책이란 게 나랑은 안 맞는 것이라 생각하고, 예전대로 인터넷 서점이나 이나 동네책방에서 책을 구입해 읽으며 지냈다.
그런데 요즘 새로 살게 된 동네에 있는 B도서관을 꽤 즐겁게 가서 매번 빌려 읽고 있다. 빌려보는 도서관 책인 건 마찬가지인데, 왜 이 도서관에서는 책을 잘도 빌려 읽게 되었을까? 이렇게 잘 빌려 보는 걸 보면 빌려 읽는 책의 불편함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집과 도서관의 거리로 치면 A도서관과 집의 거리가 B도서관과 집의 거리보다 더 가깝다. 나는 내가 무엇 때문에 B도서관에 줄곧 가는지 궁금해졌다. 객관적으로 볼때, A도서관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두 도서관을 살펴보자.
1. 규모
A도서관: 2017년 새로 개관해서 장서 18만여 권에 2-5층까지 어린이용, 성인용 책이 분류 비치 마련되어 있고, 도서 검색, 찾기도 잘 된다. 지상층만 총 4,350평 정도(14,357㎡)의 규모이다. 도서 대출 이외에도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열린다. 최근에 어린이 도서관을 한 차례 리모델링하기도 하고, 주민들이 최신 기술을 경험할 수 있는 VR가상현실 체험공간까지 최신식 시설을 구비하고 있다.
B도서관: 동네 커뮤니티 센터 안에 있는 열댓 평(45㎡)의 크기다. 4인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1개가 있어, 예전에는 거기에서 작은 클래스도 열렸었다고 한다. 작은 규모에 어린이 책, 어른 책, 동네에 관한 안 사 볼 것 같은 지역 연감 같은 책들이 꽂혀 있다. 장서 규모는 4,200여 권(홈페이지가 없어 한 2,000권쯤으로 가늠했는데, 역시 사서분께 직접 물어보길 잘했다.), 단독으로 앉을 수 있는 창가 좌석은 4자리 정도 된다.
2. 책 대여 방식
A도서관:
회원카드로 대여, 인터넷 신청한 회원에게 무상 발급 가능, 핸드폰 서울시민 앱으로도 대여 가능
대여기간 2주
회당 최대 대여 권수 5권 (연체 시 연체일수만큼 연체 불가 또는 1일 연체 100원으로 연체수수료 적용)
B도서관:
회원등록 후 이름으로 대여
대여기간 1주
회당 최대 대여 권수 3권 (연체 시 웬만하면 기다려 줌, 늦더라도 2-3주 안에는 반납했던 것 같은데, 이제까지 독촉을 받아 본 적이 없다)
3. 도서관 이용
A도서관에 아이들 책을 간간 빌리러 갔으나, 내 책은 B도서관에 와서야 잘 빌리게 되었고 막상 빌린 책을 연체 없이 꼬박꼬박 읽기도 잘 읽었다. 그래서인지 B도서관을 좋아하게 되었다.
Why B도서관?! 이유를 이제 와 짚어봤다.
첫째, B도서관에는 도서관에 있는 책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 30분쯤 유심히 훑어보면, 무슨 책이 어디에 꽂혀있는지를 눈에 모두 담을 수 있다. 나는 책의 제목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책이 어디 책꽂이쯤에 꽂혀 있다는 것을 안다. 규모가 작아 모든 주제를 깊이있게 아우를 수 없으나, 미래, 수필 에세이, 소설, 자기 계발, 요리, 가드닝 취미 관련 한 책들이 고루 꽂혀있었고, 어린이 책도 그림책, 청소년 문고, 학습 만화 등이 도서관의 중앙의 책장 두 면을 가득 차지하고 있다. 도서관에 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오니, 당장 빌릴 것은 아니지만, 나중에 빌려봐야겠다 점찍어 두는 책도 생겼다. A도서관에서는 도서관 탑 10이 전면에 나와 있다고 해도, 책이 너무 많아, 분야별 관심 가는 책을 인기와 상관없이 한눈에 훑어볼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해당분야에 ‘ㄱ 아’로 시작하는 책이 책장 하나를 넘어가면, 책을 찾는 데 인내심이 필요하다. A도서관에서는 장서가 많아 든든하기는 했지만, 나는 내가 빌리고자 하는 책을 정확히 검색해 서가로 가야 한다. 내가 몰랐던 괜찮은 책과 의외의 만남을 기대하다가는 한나절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용건만 간단히 최대한 효율적으로 단시간으로 원하는 것을 빌려 나오게 된다. 결론적으로 A도서관에서는 필요한 책 제목을 빠르게 찾는 데에만 총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게 내가 도서관을 이용하는 목적과 재미와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둘째, B도서관엔 대여 카드가 없다. 첫날 가서 어디에 살게 된 누구라고 하니, 가입 신청서를 작성하면 바로 빌릴 수 있다고 했다. 그 후 도서관에 가면 도서관 사서분이 얼굴을 알아보고 책을 빌려 보고 반납할 수 있다.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나나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고,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기분이 왠지 허전하면서도 좋다. 카드가 있어야 빌릴 수 있는 시스템은 빌리는 사람의 이름을 도용하기 힘들어 책 분실이나, 도난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얼굴로 빌리는 책 또한 생각보다 잘 없어지지 않았다. 몇 번 빌리지 않은 책이 내 이름으로 나와 있기도 했지만, 내가 빌린 책이 아니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 사서분이 다시 한번 찾아보겠다고 하고 이내 도서관 안에서 찾게 되었다. 이름을 기억하고, 빌린 책과 반납해야 할 책을 서로 헤아리며 도서관 사서 분과 나누는 이야기가, A도서관의 대여 기계보다 더 도서관을 다닐 맛이 나게 했다.
셋째, B도서관은 대여기관이 짧고, 대여가능 권수가 적다. 언뜻 생각하기에 B도서관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대여 권수와 기한이 결국 나에게 도서관 책 읽기의 즐거움을 준 것 같다. B도서관의 일주일이라는 대여 기한은 눈에 보이듯 빤하게 이틀의 휴일과 닷새의 일하는 날에 나의 독서량을 명확하게 상상하게 하고, 한 권 +@를 읽겠다는 계산이 바로 나온다. 그러면 꼭 읽고 싶은 책 한 권과 관심 있지만 쉬엄쉬엄 읽을 책 두 권을 고른다. (사실 연장도 된다. 시스템이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운영하면서 반납과 동시에 책을 빌릴 수 있는 유두리도 있다. 하지만 연장은 잘 안 하게 된다) 한 두권만 고를 때도 많다. 2주라는 긴 시간에 그 안에 또 오면 손해라는 생각으로, 막연히 읽을 법한 책을 다 때려 넣어 다섯 권을 들고 가는 것보다, 매주 빌리는 세 권 이하의 책이 더 성실히 책을 읽게 했다. 한 주 한주 와서 고르고 꼭 읽을 책을 가져가는 재미가 생기고, 지금 안 빌리면 또 언제 볼지 모른다는 생각도 줄었다. 책에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그럴듯한 착한 답으로 B도서관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답정너는 없다. 폭넓은 장서와 시스템을 갖춘 A 같은 대형 도서관이 필요한 때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좋아하고 많이 이용하는 도서관은 B도서관이다. 지금 나에게는 나를 알아보는 사서와 작은 도서관의 한눈에 들어오는 책장에서의 의외의 발견이, 책 많고 무인 도서대여가 가능한 편리한 도서관보다 더 '좋기' 때문이다. 내가 왜 최신식 내가 대규모를 자랑하는 A도서관은 잘 안 가면서, 책도 몇 가지 없고 대여권 수도 기간도 짧은 B도서관은 자주 들락 하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생각은 내가 '좋다'라고 생각한 것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A, B도서관 선택을 다시 짚어보며 '좋은'이라는 형용사를 크거나 비싸고, 새로운 것에 붙이고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내 고정관념이자 습관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크거나 비싼 것, 또는 새것을 무의식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기고, 부러워하는 것은 연년생 어린 두 형제가 꼭 필요 없어도, 자기 형제가 가진 걸 부러워하는 마음과 비슷한 것 같다. 그게 꼭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사실 느끼고는 있지만, 막상은 생각도 몸도 그렇게만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 맞는 걸 알고, 욕심부리지 않고 딱 그만큼만 찾아가는 마음이 어른이 되어서도 쉽지 않다. 나는 아니라면서도 여전히, 그리고 변함없이 넓고, 크고, 깊은 그리고 새로운, 돈을 많이 들인 것을 으레 더 좋은 것으로 상상하고 좇는다. 그러지 말아야지.
B 도서관이 왜 좋은가를 생각하면서 문득 예전에 들은 휴먼스케일(human scale)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넒고, 크고, 첨단인 것보다 사람의 눈과 손, 발과 같은 신체로 가늠할 수 있는 규모가 사람에게 더 편안함을 줄 때 쓸 수 있는 단어다. 관심을 갖고 더 찾아보니, 휴먼스케일은 한국어로 하면 “인간 척도”라는 뜻으로 사실 인테리어와 도시 디자인에서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가늠자로, 우리가 사는 공간을 디자인 함에 있어 인간을 중심으로 하자는 철학이라고 한다. B도서관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러한 맥락에서 당연한 결론일 수 도 있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뭐가 때에 따라 맞는지, 그때 그때 다르다는 것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다. 좋은 것, 더 나은 것은 꼭 정해진 한 방향이 아니다. '좋다'라는 단어가 한 방향으로만 흐를 때, 한 번 숨을 고르고 생각해 보자. 으레 '그게 당연히 그렇지!'라고 넘기기 전에 나를 살펴볼 여유, 남을 몰아붙이지 않을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
당신은 지금 A도서관인가? B도서관인가?
휴먼스케일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