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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lsim Aug 26. 2022

내가 가야할 곳

100-1

몸에 남아있는 반복된 흔적과 상처에 대해서 생각한다.

CST를 받은 지도 벌써 30회가 넘었다. 저번 주 금요일에 드러난 흉곽 한가운데, 나의 흉골 정중앙에 있는 시커먼 분화구는 아직도 욱신욱신 통증을 뿜어낸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드러나지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고수들 앞에서는 더더욱 낯낯이 파 해쳐지는 거 같다. CST 치료를 해주는 선생님 앞에 누운 내 몸은 내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선생님에게 나의 모든 과거와 삶을 보여준다. 각 부위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이미 알아챈다. 


"아 이 친구 사연이 보통이 아니네."


작년에 겪었던 아주 황당하고 희귀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은 나의 일상을 무너트리고 나의 계획을 모두 해 집어 놨다. 그리고 여태껏 겪어왔던 자가면역질환들과는 차원이 다른.. 불명열, 전신 신경통과 마비, 전정신경염이라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으로 얻은 온갖 고통과 질병들은 지금에 와서 보니, 나에게 순기능을 하고 있었다. 작년 말에 얻은 희귀하고 원인 모를 각종 증상들을 치료하려다 보니, 각 분야의 고수들, 명의들을 찾아가게 되었다. 모든 명의들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치료하기를 귀찮아하는 것일까. 왠만큼 심한 사람이 아니면 환자로 안받는다는 말을 하던 그들은, 제대로 걷지도 웃지도 못했던 나를 모른 채 하지 못하고 거두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 몸을 자세히 살펴보자마자 바로 알아채버렸다. 작년에 겪은 일보다 더 오래되고 깊은 상처가 내 몸 곳곳에 남아있다는 것을.


한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내 마음의 무덤 같은 기억과 흔적들을 아주 완벽하게 숨긴 채 살아왔다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마치 낙엽 속에 얼굴만 처박고는 큰 몸통과 풍성한 꼬리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은 모르고 완전히 숨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스컹크처럼, 내가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했던 기억과 상처들도 내 몸 여기저기에 마구마구 각인된 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CST 치료를 받으며 체득하고 있는 건강하게 이완된 상태는 내 몸이 평생 얼마나 긴장하며 살아왔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치료를 받고 난 후 잠시 유지되는, 처음 느껴보는 몸 전체의 적당한 이완과 그라운딩은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이정표를 나에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상태를 잘 기억해. 네가 도착할 지점은 여기야.

라고 잠시 알려준 후 다시금 내 몸을 보호하고 생존하기 위해 수천번 선택했던 익숙한 긴장으로 내 몸은 다시 꽁꽁 싸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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