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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곱슬머리앤 Oct 19. 2023

그런 날이 있다

손을 씻는 간단한 일도 유독 버거운 날이 있다. 손 씻어야지, 열 번 스무 번 말해도 아이는 욕실에 들어갈 생각이 없는 그런 날. 엄마랑 씻을까? 하면 혼자 씻겠다고 하고 혼자 씻게 두면 세월아 네월아 욕실에 있는 온갖 물건을 만지작거려 결국은 큰 소리를 내게 되는 그런 날.  차분히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해도,  미처 뭐라고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오르는 그런 날.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손을 씻어야 한다는 말이 오늘따라 아이에게 왜 속상하게 들렸을지 사실은 나도 안다. 이번 주 내내 몸은 아프고, 일은 많고, 하나뿐인 지원군인 남편은 며칠 째 야근이었다. 나의 고단과 피곤이 결국은 흘러넘쳐 아이 발목에서 찰랑거리고 있다는 걸, 아는 척하고 나서서 수습할 여력이 없어 모른 척하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길이 없는 아이는 내내 눈치를 보았을 거다, 크게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고, 자기 전에 읽어 주는 책은 이상하게 재미가 없고… 어린 마음에 차곡차곡 얹혀 있던 것이, 저 나름대로도 꾹꾹 참고 있던 것이 나처럼 흘러넘친 것일 테지.


울기엔 별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수긍하자니 어쩐지 좀 억울한, 애매한 기분이 된 아이는 입을 삐죽이면서도 연신 엄마의 표정을 헤아리려 애쓴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여린 마음에 생채기를 낸 것 같아 마음이 짠하다. 하려던 말들을 꿀꺽 삼키고 아이를 꼭 끌어안아 준다. 아이는 그제야 엄마 가슴팍에 눈물 콧물을 마음껏 묻혀 가며 편히 운다.


때마침 며칠 만에 제시간에 퇴근하여 부랴부랴 집에 도착한 남편이 도어록을 누르고 들어온다. 윤이가 좋아하는 고구마빵을 들고서, “아빠가 윤이 주려고 빵 가게에 남은 고구마빵 몽땅 사 왔지!” 하며 요란스레 등장하다가 엄마 품에 폭 파묻혀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당황한다. 입모양으로 ‘무슨 일이야?’하고 묻는 남편에게 “손을 안 씻겠다고 떼를 쓰다가…” 하고 싱겁게 웃었다.


긴긴 포옹을 마치고 나서야 뽀득뽀득 손을 씻겨 주고 얼굴에 말라 붙은 눈물, 콧물을 닦아 주었다. 새물새물 웃는 것을 보니 어린이 마음은 이제 말끔해진 것 같다. 아직까진 내 손으로 닦아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오늘은 마음 한편에 뿌연 마음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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