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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 mei mi Jan 12. 2021

사랑의 이름으로

- 사랑은 사랑으로 이어진다.










새해가 되어 익명의 누군가에게 받았던 악플은 마치 내 수명이 다해 죽는 날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사신의 메시지 같았다. 얼마 후 언론을 통해 16개월 아기 정인이가 아동 학대로 인

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더군다나 아이에게 가해진 참혹한 학대의 증거는 온몸에 지

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겨져 있었고 그 고통은 성인도 참아내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통증이라

한다.



희망찬 새해를 맞이 하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내게 2019년은 분명 살아 있지만 죽은 해였다. 2020년에는 고장 난 몸을 고치는데 전념했

고 간헐적 통증과 후유증이 남았지만 건강이 서서히 회복되자 마음도 함께 나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무엇하나 이룩한 것 없이 흘려보낸 시간이지만 곧이어 다가올 2021년은 여느 때보다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앞서 보낸 2년이 힘들었으니 인생의 보상 심리로

 '좋은 날'이 되어 줄 거란 근거 없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1월 1일부터 내게 악플이 드

리운 죽음이란 단어와, 무한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아야 할 나이에 무참히 짚 밟힌 어린 생명에

세상과의 이별은 단숨에 허망함을 마음속에 가득 채웠다. 묵직하게 침식돼서 퍼저가는 슬픔은

이 세상에 사랑이라는 수분이 메말라 퍽퍽한 것이었다.







- 얼마 전 구매한 <윤미네 집> -


- 자연스러운 순간의 기록들 -





'무엇보다 세상에 사랑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오래전 잠시 보았던 책이 떠 올

랐다. <윤미네 집>은 딸 윤미가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아버지인 전몽각 선생이 사진으

로 남긴 성장의 기록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은 어떠한 꾸밈도 없이 사진 하

나 하나가 그 시간을 품고서 말해주고 있다.



스치듯 접했지만 진한 여운을 남김 그 책을 언젠가 소장하려 했으나 1990년 소량 출판하고

절판되어 찾을 수 없었다. 불현듯 온라인 중고 서점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검

색 했다. 그런데 이미 2010년 <윤미네 집>이 재출간되어 있었고 상당수의 중고 서적으로도

매물이 나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원래는 새책으로 갖고 싶었지

만 빠듯한 백수의 살림에서 도서 구입을 위한 문화비는 예정에 없던 지출이었다. 아쉽지만

중고 서적을 선택했다.




문 앞에 배송된 책을 받고 포장된 비닐을 열어 책을 살폈다. 선명한 빨간색 천이 씌워진 양장

본에 하얀색 폰트. 직사각형 책의 사분의 삼 가량을 차지한 넓은 미색(米色)의 띠지에는

녀가 거울 앞에서 환히 웃고 찍은 흑백사진이 독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리고 재판되어 나

오면서 함께 수록된 유작 '마이 와이프(My Wife)'로 기존의 책 제목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아내'라는 부제가 더 해 졌다. 이로서 고인이 되신 작가의 지고지순한 가족 사랑은 더

견고하게 완성되었다.






- 나를 놀라게 했던, 책이 가진  흔적.  -




내가 선택한 이 책은 상품(上品)의 중고 서적이 가득한 곳에 있던 유일한 '중급'이었다. 이천

원을 아끼기 위해 선택했지만 받아보니 띠지가 누렇게 빛바랜 것을 빼고는 오래된 하자를 찾

을 수 없이 상태가 좋았다. 그렇게 잘  샀다고 만족하며 왼손으로 책을 들어 전체적으로 돌려

보다가 깜짝 놀랐다. 책등 부분을 제외한 삼면에 또렷하게 찍혀 있는 글씨 때문에!


(주) **의 자산입니다.


자세히 보니 책등에는 도서관에서 보관을 위해 붙이는 청구 번호 스티커를 뗀 자국이 종이를

긁어내고 자리 잡고 있었다. 뭐지.. 설마.. 말로만 듣던 장물(物)?! 예전에도 몇 번 중고서적

을 구매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삭막해도 설마 하니 책을 훔쳐

내다 팔까? 방금 전 책을 보고 받았던 감동은 잊은 채  혹시 모를 불순한 일은 아니길 바라며 책

판매자의 연락처를 찾아 보았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저... 안녕하세요? ***에서 중고서적을 구매한 사람이에요. 여쭤볼 것이 있어 연락드렸어요."


"아, 네. 말씀하세요."


"책에..(주)**의 자산입니다.라고 찍혀 있어서요."


"아! 네...."


"제가 중고 서적을 구매하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개인이 아니라 회사의 소유 같아서요."


"아.. 그 표시.. 뭔지 알겠어요. 원래 직원들 보라고 둔 책인데, 지금은 그 책을 볼 직원이 전부

없어서... 제가 처분한 거예요."


"그럼 실례지만 (주)** 대표님이신가요?"


"네. 맞아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회사에서 바로 책을 포장해 나에게로 보냈을 마음에 대해 떠올리게 됐다.-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네이버에 (주)**을 치자 회사의 연혁과 위치, 분야까지도 상세히

나왔다. 내실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그리고 책을 담은 비닐에 붙은 택배 송장의 발신지는 (주)

**의 사명과 주소가 적혀 있었다.



전화로 상세한 내막은 듣지 못했지만, 이 책의 원주인()인 '직원들'을 얘기하는 회사

대표님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곧 1년이

되어 가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회사의 재정이 악화되어 벌어진 일이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회사의 구성원들이 흩어진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한편으로 나는 부러웠다. 직원들을 위해 채워

진 서가라니, 책등에 청구 번호 스티커를 붙여 관리할 정도였다면 아마도 꽤 많은 책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경제, 인문, 어학, 트렌드 등의 분야도 아닌 '사진집'을 책장에 넣어

준 회사라니... 직원들을 향한 회사의 배려와 마음이 남다름을 느낀다. 많은 직원의 손이 매만

진 정감 어린 그 책중 하나를  내가 소장하게 될 줄이야. 뜻깊은 새해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가족을 사랑한 아버지가 만든 사진 기록은 책의 주인공인 따님 윤미 씨가 시집가서 미국으로

떠남과 동시에 끝을 맺는다. 그리고 사진집으로 발간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이역

만리 떨어진 물리적 거리도 떼어 놓지 못한 강한 사랑의 유대감(紐帶感)이다. 책으로 엮어 발

간된 이후엔 타인의 눈길과 손길을 통해 종이에 새겨진 사랑의 의미가 보는 이의 가슴에 또렷

 박힌다.



사랑의 이름으로 시작된 작은 순간이, 사람과 만나며 거듭된 추억을 낳고 또 다른 사랑으로 이

어진다. 그것은 예기치 못 한 인연일 지라도 예외가 없다. 나 또한 느꼈으니까. 그래서 바라건

대 지금 하늘에 있는 그 작고 예쁜 아이가 다음 생이 있다면 이처럼 포근한 사랑 속에서 오랫

동안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작가의 이전글 새해 첫날, 생애 첫 악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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