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데, 좌와 우가 어딨으며 종북은 무슨 소린가
19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목포로 가던 일본 배인 ‘구마가와마루’와 같은 회사 소속의 배인 ‘기소가와마루’가 어청도 서북방 3~5킬로미터 지역에서 충돌해 구마가와마루가 침몰했다. 이 배에 44세의 나이로 익사한 미국인이 있었다. 그의 시신은 실종 상태로 수습하지 못했다. 시신은 그를 따랐던 한국인 여학생과 조한규 조사와 함께 어청도 바다에 수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충돌 수 분 전에 경적을 울렸지만 침몰 선박인 구마가와마루는 기적도 울리지 않았다. 가해 선박 기소가와마루와 피해 선박 구마가와마루는 서로 껴안은 것 같이 충돌했다. 기소가와마루는 선수가 손상되었으나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선장 구로다는 인명 구조를 외면하고 침몰 여부 확인도 전에 가해 선박으로 피신했다. 세월호 선장처럼 말이다.
가해 선박에서도 피해가 있었다. 한국인과 일본인 각 1명이 익사하였다고 기록(대판 상선 80년사)되었으나 대판매일신문 등 일본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고 한다.
피해 선박(구마가와마루, 558톤)은 오사카 제철소에서 만든 일본 최초의 강선이라고 한다. 애초 스미다가와마루(694톤)가 운행할 예정이었으나 수선 중이어서 이 배가 대선으로 운행되었다. 피해 선박의 사망자 수는 명확하지 않다.
사고 선박인 구마가와마루는 아시아판 타이타닉 호였다.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를 압도하는 해양대국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배로 국가적 자랑으로 삼은 배였다고 한다. 사고 원인에 대해 ‘청명한 날씨 속에서의 질주’라고 보도한 <朝日新聞> 등을 근거로 맑은 날씨와 잔잔한 해류 상태에 대한 긴장감 해이와 업무 태만으로 보고 있다. 선박 충돌이 승무원들의 업무 태만으로 인한 인재(人災)라는 사실을 성토하고 있는 일본 <每日新聞>의 보도 내용도 이를 뒷받침한다. 사고 시간은 밤 11시 전후였다.
이 일본 선박 충돌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사고 이후 사망 미국인 가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민사 소송을 7년이나 계속한 일이다. 일본 정부는 국제적으로 예민한 이 문제를 7년이나 끌면서 해양강국으로서의 위상이 손상될까 봐 진실 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7년 동안 일본의 해운선박 사업의 위축을 우려해 미국과 어떤 국가적 공조를 했는지는 논문을 찾아 봐야 한다. 구글 자료에는 ‘미국과 일본의 국가적 판단에 입각한 판결’이라며 미국인 가족은 7년간의 싸움에서 패소했다고 나온다.
그 미국인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내한 미국인들 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주요 인사 중 한 명이었는데, 그런 그의 죽음에 대한 배상 처리가 합리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일본 당국이 감당해야 할 외교적·정치적 부담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홍승표 박사(연세대 신학과)는 “오사카상선회사는 자회사와 일본해운업체들에게 앞으로 사업상 불리하게 작용될 판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막대한 소송비용을 들여서라도 집요하게 그 배상 책임 회피를 위해 노력한 결과, 사망 미국인 가족은 적절한 배상을 받지 못하고 패소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또한 가츠라테프트 밀약 이후 이전보다는 재한(在韓) 미국민 개인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일본 당국의 부당한 재판에 대해 외교적 대응을 자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쯤에서 그 미국인이 누구인지 밝힌다. 그는 1885년 국내에 들어온 첫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enzeller 1858∼1902)다.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함께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로 한국 감리교회 창설과 내 모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아들인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1889~1953)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아펜젤러의 죽음에 대한 자료에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군산 앞바다(혹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 사고로 익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사고 당시 아펜젤러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한국인 조사와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다가 사망한 순교자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미국과 조선의 환경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암흑의 땅에 생명을 걸고 온 아펜젤러의 실종 참사 앞에서 그의 가족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7년 동안이나 진실 규명과 피해 보상의 소송을 한 것은 사고사한 아펜젤러를 통해 돈을 보상받겠다는 추궁으로 볼 수 없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슬픔을 간직한 그 가족은 1902년 당시, 일본 정부가 이 침몰 사건에 대해 대충 얼버무리지 않도록 재발 방지를 위해 끈질기게 싸운 것이다. 비록 7년이나 계속한 그 싸움에서 패소하고 말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은 선교사 가족으로 ‘교회 안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정치인들에게 세월호 사건을 맡기고 침묵할 게 아니라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항의하고 희생자의 편에 서야 한다. 이러한 대형 참사에 침묵하거나 국가가 알아서 수습하기를 기다린다면 10년 후 20년 후에도 똑같은 참사에 똑같은 어처구니없는 대응 방식이 반복될 것이다. 세월호 1주기를 맞으면서 한국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 참사를 다룰 사고와 대응할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유교적 의식에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로마가 야만족들에 의해 무너진 것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이란 책에서 “로마는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 이 땅의 도성이며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이기적인 자신에 대한 사랑과 세속적 명예를 숭상하는 이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로마의 부도덕과 타락은 결코 기독교 제국이 되었다고 해서 모면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국가에 대해 문제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국가주의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글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아펜젤러 가족처럼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힘을 다해 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참 안타깝다. 1902년 아펜젤러 선교사의 실종 사망 사건을 겪은 그 신실한 믿음의 가족들은 모국의 비협조 속에서 7년이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놓고 싸웠다. 2014년 4월 16일을 지나온 우리 크리스천에게 생각할 바를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다음 세대에게 세월호를 물려주지 않으려면 법을 마음대로 피하고 주무르며 도덕성을 상실한 기득권층이 긴장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겪은 유가족들의 울분과 외침에 귀를 기울이고 위로해야 한다. 긍휼의 마음으로 우는 자들의 울음에 마음을 여는데 좌와 우가 어디 있으며 종북은 또 무슨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