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중년 우울 24화

적절한 고통의 유익

과도한 고통도 적절하게 받아들이면...

by 황교진



교회 후배 성호가 직장에서 만들고 있는 간행물을 도와줄 북디자이너를 소개해 달라고 하기에 지인을 추천해 주었는데 사정상 성사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고맙다며 커피 선물권을 보내 주었다. 결과가 없어도 감사 표시를 해주는 후배에게 살짝 감동이 되었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 길에 카톡으로 받은 그 커피 쿠폰을 사용하지 않은 게 떠올라 쓰기로 하고 베이글을 추가시켜 아침 대용으로 먹으며 잠시 쉬고 있다. 받을 때는 한여름이라 아이스 카페모카 쿠폰이었는데 지금 목감기 기운이 있어 따뜻한 모카커피로 바꾸어 주문했다.
처음 와본 강남역 12번 출구 옆의 카페베네는 작은 빌딩 로비 공간 전체를 매장으로 쓰는데 입구가 흡연실 쪽이 더 크다. 끽연 손님이 훨씬 많기도 하고. 나는 담배 피는 사람들 이해한다. 그들이 담배를 피는 그 타이밍에 난 커피를 마시며 다음 업무로 넘어갈 때마다 긴장을 해소하기도 집중하기도 하니까.


오늘 오랜만에 와 본 강남역 12번 출구는 고등학교 졸업 후 거의 매일 찾아온 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이다. 종합반보다 단과반을 다니며 재수, 삼수를 한 나는 여기 강남도서관을 입시 준비 공간으로 애용했다. 영재학원이란 종합반을 다니기도 했지만 학원비 낼 때마다 재수생 아들을 인정할 수 없어하는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다 보니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쿠폰 사용할 카페를 찾다가 12번 출구로 나오며 오래전에 학력고사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가을의 그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괴로운 일상이었어도 도서관의 학습 공간보다 현대소설 등 문예지를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열람실을 선호하며 생각에 잠기던 그때, 대학생으로 시험공부하러 온 친구들과 마주쳐 멋쩍기도 했다. 그러나 내겐 자아 성찰을 깊이 할 수 있던 뜻깊은 시간이기도 했다. 당시 내가 재수를 거치지 않고 대학에 들어갔어도 집안 형편상 바로 휴학하거나 입대해야 할 상황이었다.


한여름에는 도서관 올라가는 계단이 높아서 땀을 소나기처럼 흘렸다. 지금 청춘들처럼 많이 아픈 그 시기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었기에 내면의 아픔은 독서와 사색으로 풀었다.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아버지에게서 멀리 떠날 방법을 강구하며 책 속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앞에 걸어가는 뒤태가 예쁜 여자분이 멜로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몇 걸음 따라간 적도 있었다. 바로 정신 차리고 도서관으로 올라가면서 이런 기간이 오래 가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겠단 생각에 나름 열심히 공부하며 성경 일독도 그때 처음 했다.


세월이 지나 책 만드는 일을 하다 보니, 그때 재수 삼수했던 젊은 날의 고독은 내게 유익한 시간이었음을 절감한다. 어제 신간 미팅을 한 저자 분이 내게 언제 글이 잘 써지는지 물으셨는데 내 대답은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나왔다.
"업무상 써야 하는 글은 마감을 앞두었을 때이고요. 제가 쓰고 싶은 글은 마음에 고통이 있을 때입니다."
같이 웃었다. 사실 마감도 고통이니까. 우리는 고통이 있어야 일도 되고 살 수도 있다. 적절한 고통을 즐기지 못하면 폐인이 되고, 과도한 고통에만 시달리면 우울증 환자가 된다.


나는 요즘 겪는 무수한 고통을 잘 이해하고 감당하고 있는가? 대출받은 통장까지 모두 바닥난 현실에 안심하고 살기란 너무 버겁다. 어머니 입원해 계신 병원에서 병원비 납부하란 문자가 띠릭 올 때 이 오랜 고통의 문제는 누구 때문인지 찾으려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감당해 온 모든 현실에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삶에 답이 없음을 알고 오늘 하루 내가 게을렀는지 이겨내려고 계속 부딪쳐 본 하루였는지 점검하는 중에 이렇게 커피 한 잔 선물에 크게 감동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덤덤히 일어나는 것이다.

201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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